[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는 의병장 후손이다. 태극기에 의지해 80년 살았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8.14 03:34

[177] '불원복(不遠復)' 태극기와 의병장 후손 고영준

고영준이 창평에 살게 된 내력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 연도도 생각나지 않는다. 1939년생인 고영준은 국민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중학교 1학년 때 6·25를 당했으며 대학교 4학년 때 4·19를 겪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직장생활 열심히 하며 살았다. 어느 날 전남 장흥에 있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장흥 고씨 문중 어른이 와글와글 앉아 있었다. "자네, 어차피 결혼하면 집을 떠날 터이니 조금 일찍 떠나시게." 손이 끊어진 친척집 녹천 고광순 문중 종손으로 입적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영준은 1963년부터 전남 담양 창평마을에 산다. 문중 어르신이 "이건 이제 자네가 간직하라"며 준 증조부 고광순 유품 태극기 한 장에 의지해 지금껏 산다. 태극기 이름은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다. 그가 말했다. "내가 부잣집 막내아들인데, 그때 싫다고 했으면 내 맘대로 즐기고 살았을 터인데, 지금 이리 산다." 태극기는커녕 녹천 고광순이 누군지 몰랐던 고영준이다. 이제 그 고영준이 '지금 이리' 살기까지 장장 400년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서기 1592년 7월 금산

임진왜란이 터졌다.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 전라도 담양에 은퇴해 있던 고경명에게 불길한 뉴스가 속속 전해졌다. 4월 28일 신립이 탄금대에서 대패했다. 6월에는 용인에서 6만 조선군이 일본군 1600명에게 궤멸됐다. 이에 퇴직한 문관 고경명이 격문을 돌렸다. 이러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과 아들 고종후, 고인후. 그리고 그들 후손인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 이들의 후손인 고영준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태극기는 고광순이 의병을 창의하며 깃발로 사용한 ‘不遠復(불원복) 태극기’ 복제품이다. 진품은 독립기념관에 있다. 현재 태극기와 형식이 많이 다르다. 뒤편 건물은 고인후 의병장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다. 지독한 고집이 지독하게 유전돼 이 집안을 400년 의병 가문으로 만들어놓았다.이미지 크게보기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과 아들 고종후, 고인후. 그리고 그들 후손인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 이들의 후손인 고영준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태극기는 고광순이 의병을 창의하며 깃발로 사용한 ‘不遠復(불원복) 태극기’ 복제품이다. 진품은 독립기념관에 있다. 현재 태극기와 형식이 많이 다르다. 뒤편 건물은 고인후 의병장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다. 지독한 고집이 지독하게 유전돼 이 집안을 400년 의병 가문으로 만들어놓았다. /박종인 기자

'조선군이 대패하였다.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군사들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본도는 본래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아비는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동생을 도와 함께 일어나자. 속히 결정하여 따르고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1592년 6월 1일 '선조수정실록') 관군의 패배를 백성이 돌이키겠다는 격문에 선비와 서민이 응모해 군사 6000여 명이 모였다.

6000여 의병이 싸운 곳은 당시 전라도 금산이었다. 관군의 용인 참패 한 달 뒤 의병들 또한 모두 전사했다. 고경명도 죽었다. 함께 출전한 둘째 아들 고인후도 죽었다. 고경명은 예순 살이었고 고인후는 마흔한 살이었다. 시신은 맏아들 고종후가 찾았다. 고씨 문중에 따르면 의병 시신 더미 속에서 옷섶에 고경명, 인후 두 이름 수놓은 시신을 가려내 장례를 치렀다. '자식을 깨우쳐 함께 일어난' 의병장 부자의 죽음이었다. 고경명의 동생 고경신은 제주도에 군마(軍馬)를 구하러 갔다가 풍랑 속에 죽었다.

서기 1593년 6월 진주

아버지와 동생 시신을 수습한 맏아들 종후는 복수할 사람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상복을 입고 종군해 아비의 남은 병사를 모았다. 사람들은 그를 의병 복수장(義兵復讐將)이라 불렀다. 이듬해 6월 경상도 진주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592년 10월 벌어진 1차 진주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10만 대군을 소집해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다. 이에 앞서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사령관 유경에게 이리 경고했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피하게 하라. 성이 텅 비고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일본군도 즉시 철병할 것이다."(1593년 7월 16일 '선조실록') 일본과 강화협상 중이던 명나라 부대는 진주에서 즉각 철수했다.

성 안에는 끽해야 1만 관군과 근 5만에 이르는 백성과 의병이 모여 있었다. 김천일, 황진, 최경회, 이계련, 변사정, 민여운 등 전국 의병장이 군사를 이끌고 진주에 집결했다. 그 가운데 의병 복수장 고종후와 400 병사가 있었다. 열흘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죽었다. 의병 복수장 고종후도 죽었다. 아비 고경명의 또 다른 동생 고경형도 진주에서 함께 전사했다. 아비 삼 형제와 아들 두 형제가 전쟁터에서 그렇게 죽었다. 참전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죽어야 할 의무는 더욱 없었다.

불천위(不遷位)를 받은 세 부자

1771년 11월 13일 영조가 고경명 후손에게 불천위 제사 허가를 명했다. '불천위(不遷位)'는 4대로 끝나야 하는 제사를 영원무궁토록 올릴 수 있는 지위이니, 성리학 세상에서 불천위는 문묘 배향과 함께 최고 영예였다. 그날 영의정 김치인이 "훈장 받은 사람만 법적으로 불천위가 가능하다"고 반대했다. 고민하던 영조는 그날 오후 "세 부자의 충의를 그 누구에 비기랴"며 전격적으로 불천위를 허락했다.(1771년 11월 13일 '승정원일기') 15년 뒤 정조는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에게도 동일하게 불천위를 허락했다.(1786년 9월 7일 '정조실록') 세 부자는 광주 포충사에 모셔져 있다. 이제 20세기 담양으로 가본다.

서기 1907년 창평을 덮친 일본군

1905년 을사의병과 1907년 정미의병이 활활 타오르던 때였다. 전남은 '전도가 거의 폭도 봉기의 소굴로 화했다.'('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3, p554) 그 폭도들의 '거괴(巨魁)' 가운데 한 명은 고인후의 11대손 고광순이었다.(앞 책 p560) 1907년 8월 일본군이 창평 유천마을을 습격해 고인후 종가를 불태웠다. 장손 고재환이 선조 고인후의 사당을 가로막자 일본군은 고재환 낭심을 대검으로 찌르고 나머지 건물과 서적과 문서는 모두 태웠다. 사당과 신주는 무사했다. 거괴가 이끄는 의병부대를 박멸하기 위해 집을 불태운 것이다.

남한대토벌과 폭도도로(暴徒道路)

1907년 정미년을 전후해 일본군은 속칭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호남을 중심으로 항쟁 중인 의병 세력 박멸 작전이었다. 작전에는 '교반적(攪拌的) 방법'도 포함됐다. 마치 회오리가 몰아치듯, '폭도(의병)로 하여금 일본군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는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경비선 및 소수 부대로써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진퇴양난에 걸려 자멸 상태에 빠지게 하는' 작전이었다.('조선폭도토벌지', 앞 책 p792) 그 결과, 일본 기록에 따르면, 1909년 10월 말에는 '섬진강 이서 전라좌도는 깨끗하게 청소됐다.' 투항한 의병은 해남에서 하동까지 도로 공사에 투입됐다. 일본인은 이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불렀다.('목포지', 1914)

서기 1907년 10월 연곡사

위정척사 세력이 강했던 호남 지역은 1895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과 단발령 이후 의병 창의가 끊이지 않았다. 고광순은 민씨 세력 핵심인 민응식이 뇌물로 과거 합격을 농단하자 고함을 지르고 낙향한 선비였다. 고광순은 선각자인 문중 인사 고정주가 만든 신교육기관 상월정에서 공부를 했다. 상월정은 현 창평초등학교 전신이다. 그리고 최익현, 기우만 같은 척사파와 함께 을미년부터 의병으로 활동을 했다. 그러다 정미년이 왔다. 예순이었다. 태극기로 부대 깃발을 만들었는데, 사방에 괘를 수놓고 가운데에는 태극을 수놓았다. 그 위에는 '不遠復(불원복)'이라 수를 놓았다. 나라가 엉망진창이 됐지만 '머지않아 회복되리라'는 뜻이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不遠復(불원복) 태극기’. 1907년 의병장 고광순이 네 괘와 태극, 그리고 ‘不遠復’ 세 글자를 수놓아 만들었다. 지금 표준 태극기와 괘 위치와 태극이 많이 다르다. ‘머지않아 돌아오리라’라는, 국권 회복을 향한 강한 신념이 담겨 있다.

1895년 을미의병 이후 1907년까지 고광순은 10년 넘도록 총을 들었다. 그리고 1907년 10월 17일 장기 항전을 위해 전남 구례 연곡사에 마련한 은신처가 발각됐다. 일본군 보병 12사단 14연대와 진해만 요새 포병대 연합부대가 연곡사에 포탄을 퍼부었다. 오전 6시 30분 개시된 이 전투에서 고광순 부대는 14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했다.(1907년 10월 17일 '일본군 보병 14연대 진중일지', 토지주택박물관)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부대원 300여명은 뿔뿔이 흩어졌다. 고광순도 죽었다. 고광순과 한 집안 고제량도 죽었다. 집안 사람인 고광수, 고광문, 고광훈, 고광채는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사위 기산도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했다.

그가 죽자 구례에 살던 매천 황현이 찾아와 봉분을 만들어 줬다. 황현은 "격문을 써달라"며 고광순이 보낸 사람을 완곡히 거절한 적이 있었다.(황현, '고광순 약전', 녹천유고) 그게 마음에 걸렸던 이 선비가 시를 쓴다. '우리네 글을 써서 무엇 하리오(我曹文字終安用)'(황현, '고광순 의병장을 조문함·弔高義將光洵') 총을 든 선비 앞에서 총을 들지 못한 선비가 그리 자조를 했다. 황현은 3년 뒤 자결했다. 1958년 구례군민은 연곡사에 고광순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고영준이 '지금 이리' 살게 된 400년

여기까지가 고영준이 격세유전(隔世遺傳)으로 살아온 400년 역사다. 독한 고집이 그렇게 독하게 유전되었다.

증조부 고광순은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고광순은 지금 대전 현충원에 있다. 증조모 나주 오씨를 합장하려고 족보를 들고 갔더니 사문서(私文書) 말고 '호적등본' 따위 공문서를 달라고 했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재산, 피탈재산을 신고하라고 해서 갔더니 '부동산 등기부'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당국 사무실이 두 번 뒤집어졌다. '불원복 태극기'는 독립기념관에 위탁했다. 사당은 허물어져 대문만 남기고 다시 세웠다.

고영준은 의병장의 증손으로 '생계부조금'을 받는다. 1965년 한·일 협상 대일청구권 자금 중 10억원과 기타 자금 10억원을 출연해 만든 독립유공자 유가족 원조금이다. 그때 고영준 어머니가 받았던 돈은 1만5000원이었다.

지금 고영준이 받는 생계부조금도 1만5000원이다. 1980년 '유족' 범위가 손자녀까지로 축소되면서 증손자는 자격이 박탈됐지만, 기득권 존중 차원에서 유지되는 금액이다. 보훈처에 따르면 생계부조금을 받는 후손은 16명이다. 월 6500원 받는 후손도 있다. 아무런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하는 후손이 훨씬 많으니, 국가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영준 또한 섭섭하지는 않다. 그냥 "웃긴다"고 했다. 그저 이 지독한 고집이 더 이상 유전될 일이 없을 세상을 꿈꿀 뿐.



조선일보 A26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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