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형극+일본 그림자극, 다른 듯 닮은… 우리는 친구

양승주 기자
입력 2019.08.14 03:00

조현산 & 고토 게이… '루루섬의 비밀' 만든 韓日 연극인
5년간 공동 제작한 인형극 선봬… 가족의 사랑·환경 문제 담아내

"주인공 소녀의 이름 '하루'는 한국에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을, 일본에선 '봄'을 뜻하죠. 하루의 친구인 고양이 '마루' 역시 의미는 다르지만 두 나라에서 모두 쓰이는 단어고요. 다른 듯 닮은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담고 싶었습니다."

소녀와 고양이 인형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남자가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한국의 인형극단 '예술무대산'의 조현산(50) 대표와 일본 최고(最古) 그림자극단 '가카시좌(かかし座)'를 이끄는 고토 게이(64) 대표는 5년간 공동 제작한 인형극 '루루섬의 비밀'을 지난 6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고 있다. 도시에 살던 소녀 하루가 발명가 할아버지가 사는 루루섬에 여행 와 마루를 비롯한 동물 친구들과 흥미진진한 모험을 벌인다. 대사가 거의 없는 비언어극이지만, 인형과 그림자는 물론 음악과 영상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가족의 사랑과 환경의 소중함이라는 주제를 그려낸다. 첫 공연이 끝난 극장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약속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들이 공연 내내 깔깔대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인형극 ‘루루섬의 비밀’을 제작한 조현산(오른쪽) 예술무대산 대표와 고토 게이 가카시좌 대표. 이들은 “배우들의 연기와 관객의 상상이 만나 살아 있는 존재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인형극과 그림자극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두 사람은 각자의 나라에서 인형극과 그림자극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해왔다. 조 대표가 2001년 창단한 '예술무대산'은 인형극에 무용·영상 등을 도입한 실험적 작품들을 선보이며 세계 20개국 90여개 도시에서 공연해왔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비극을 그린 대표작 '달래 이야기'는 '인형극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와 함께 2012년 중국 세계인형극총회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았다. 1952년 아버지가 세운 '가카시좌'를 대를 이어 이끌고 있는 고토 대표 역시 기존엔 막 뒤에서 공연하던 배우들을 무대 전면에 내세우고, 영상과 음악 등을 결합하는 등 현대적으로 연출한 그림자극으로 주목받고 있다.

할아버지가 손녀 하루의 식사를 위해 계란을 모으는 장면. 한국과 일본 단원들은 인형과 그림자 연기를 오가며 등장인물들을 표현한다. /예술의전당

2012년 브라질에서 열린 인형극 페스티벌에서 '달래 이야기' 공연을 본 고토 대표가 먼저 조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했다. "이전에도 한국 인형극을 본 적 있지만, 기술은 물론 감정 표현까지 이렇게 섬세한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장르 간 결합에도 열려 있는 모습에 '우리랑 잘 맞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양국을 오가며 서로의 공연 방식을 배우는 워크숍을 진행했고, 5년 전부터는 인형과 그림자는 물론 양국의 문화가 한 무대에서 호흡하는 작품을 기획했다. '가족'과 '환경'이라는 한·일 공통의 관심사를 주제로 선정하고, 공연 방식 역시 양국 단원들이 최대한 함께하도록 구성했다. 예컨대 '하루' 인형을 움직일 때 상체는 한국 단원이, 하체는 일본 단원이 잡는다. 그림자극 장면에도 한국 단원이 일부 참여한다. 조 대표는 "처음엔 낯선 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던 하루가 점차 할아버지와 동물들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줄거리 역시 멀게만 느껴졌던 두 나라 극단이 가까워진 과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일 관계가 급격히 얼어붙으며 '루루섬의 비밀'은 뜻밖의 시련을 겪었다. 예술의전당 공연 이후 예정됐던 국내 공연 일부가 반일(反日) 정서를 이유로 취소된 것. 두 대표는 그러나 "지금이 오히려 이 작품을 보여줄 적기"라고 입을 모았다.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겠지만, 스스로는 중요한 순간에 의미 있는 공연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미움만으로는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겠죠."(조 대표) "'정치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이 공연이 탄생한 과정이 양국 관계에 하나의 가능성이 되길 바랍니다."(고토 대표) 오는 2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02)580-1300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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