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75] 가야사 쟁탈전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입력 2019.08.14 03:12
금동관, 복천동 고분군, 보물 1922호, 국립김해박물관.
영호남 지자체 20곳 이상이 '가야사 연구'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지자체가 특정 학문 분야 연구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가야사 연구가 국정 과제에 포함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가야에 관한 전승이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은 앞다투어 '가야 문화권'에 속해 있음을 표방한다.

김해, 함안, 고령, 합천, 고성처럼 역사 기록과 발굴 자료가 부합하는 곳은 그리 보아도 문제가 없지만 그 밖의 여러 곳은 본디 가야였는지 알기 어렵다. 가야의 범위를 밝히기 위해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은 신라나 백제의 영역을 획정한 다음 그 사이에 끼인 곳을 가야로 보기도 한다. 특정 지역이 가야 문화권에 속하는지 아닌지는 지자체의 선언만으로는 결정될 수 없다.

가야와 신라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학계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논의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관학자들이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면서 가야의 범위를 넓게 보기 시작했다. 신라는 경주와 그 주변에 한정되고 가야가 신라보다 넓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에서 비롯했다.

1980년대 이후 영남 각지에서 발굴이 이어지면서 학계는 신라와 가야의 경계를 다시금 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늦어도 5세기 무렵부터는 김해에서 대구에 이르는 구간에선 두 나라의 경계가 낙동강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영남 지역 학자 가운데서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여전히 가야 고분군으로 보기도 하며, 그러한 시각이 가야 고분군 세계 유산 등재 대상을 선정하는 데 반영되기도 했다.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쓰려면 가야사 연구의 진전이 절실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정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1990년대에 정치권이 '대선 전략'의 일환으로 가야사를 띄워 표를 얻은 적은 있으나 연구의 진전은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으로 가야사 연구를 생각한다면 정치 논리를 과감히 걷어내고 학술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일보 A31면
도시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