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청장 'NO 재팬' 내걸다… 상인 반발로 4시간만에 철거

강다은 기자 윤창현 인턴기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년) 임진희 인턴기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4년)
입력 2019.08.07 03:00

명동 등에 1100개 달려다… "日관광객 다 쫓아낼 거냐" 항의받아
靑 청원 등에 비판글 올라오고, 박원순 시장도 전화로 우려 전달

서양호 중구청장
서울 중구청이 6일 명동을 비롯한 주요 거리에 '반일(反日)·일제 불매'를 주장하는 깃발 1100개를 걸다가 여론의 반발 등에 밀려 4시간여 만에 중단했다. 걸었던 깃발도 모두 회수했다.

이날 오전 10시쯤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깃발 50세트와 사다리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트럭엔 중구청 마크가 찍혀 있었다. 트럭에 실린 깃발은 두 장이 한 세트로 구성됐는데, 한 장은 태극기, 다른 한 장은 'NO. BOYCOTT JAPAN: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였다. 구청 직원들이 트럭을 타고 돌며 가로등마다 이 깃발을 걸었다.

중구청은 이번 깃발 게양 계획을 하루 전인 5일 공개하면서 "중구는 서울의 중심이자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오가는 지역으로 전 세계에 일본의 부당함과 함께 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자"고 했다. 그러자 불과 만(滿) 하루 남짓한 기간 깃발 게양에 반대하는 비판 글이 중구청 홈페이지에 400개 가까이 쏟아졌다. '구청장에게 바란다' '생활불편신고' 등 게시판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비슷한 글이 올라왔다.

현장 상인들 불만 목소리도 컸다. 6일 오전 명동 K팝 기념품점을 홀로 지키던 직원은 "2주 전쯤부터 일본인 관광객만 절반으로 줄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반일 깃발을 내걸 생각을 하다니 구청이 미친 것 같다"고 했다. 일본인이 전체 고객의 50%가 넘는다는 한 화장품 가게 매니저 김모(40)씨는 "상인에게 타격이 올 것이 뻔한데도 배너 설치 결정 때 우리에겐 상의 한마디 없었다"며 "여기 다 외국인 상대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상인들이랑 여기 온 죄 없는 일본인들은 무슨 봉변이냐"라고 말했다. 또 다른 화장품 가게 직원 윤모(31)씨는 "불매운동 할 거면 구청장 혼자 하면 되지 우리까지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으냐"라고 했다. 이날 두 딸과 명동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 야마자키씨는 "그렇지 않아도 출국 전 한국의 반일 감정에 관한 뉴스를 봤는데, 그런 깃발이 걸려 있다면 일본인 입장에서 한국을 다시 찾긴 어렵다"고 했다.

6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인근 도로에 내걸린 반일 배너기가 철거되고 있다. 중구는 이날 덕수궁 대한문∼동화면세점 가로등에 반일 배너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걸었으나 4시간 만에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배너를 모두 내렸다. /류인선 조선비즈 인턴기자
중구청은 한때 요지부동이었다. 서양호 중구청장이 이날 오전 10시쯤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왜 구청은 나서면 안 되지요? 왜 명동이면 안 되나요?"라며 "지금은 경제판 임진왜란이 터져서 대통령조차 최전선에서 싸우는 때"라고 했다. 이어 "중구의 현수기는 국민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상처 입고 돌아갈 일반 일본인 관광객에게 미안하다' '구청장이 사리분별도 못하나' 등의 댓글을 달았다.

상황은 4시간여 만에 180도 달라졌다. 서 구청장은 이날 오후 2시 30분쯤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에 국민과 함께 대응한다는 취지였는데 뜻하지 않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 배너기를 내리도록 하겠다"고 썼다. 오후 4시 무렵 중구에선 깃발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 구청장은 이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후 2시쯤 서 구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깃발에 대한 우려 의견을 표했다"고 말했다.

서울시관광협회는 이날 "10월부터 일본인 관광객 수가 예년 20~30% 수준으로 급감하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서울시에 대책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협회는 "특히 수학여행 등 단체 관광 예약이 급감했다"고 했다. 서울시 관광 안내 자원봉사자인 50대 여성은 "서울 주요 관광지에서 일본말 듣기가 어려워졌다. 체감상 40%는 줄었다"고 했다.

작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중 일본인 비중은 19%(295만명)로, 중국(479만명·31%) 다음으로 많았다. 올 상반기는 일본인 비중이 20%였다. 서울시가 조사한 재(再)방문율도 일본인은 68.5%로 중국인(60.8%)보다 높았다.

한편 이날 오후 '중구청 반일 깃발이 일제 프린터로 인쇄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본지 확인 결과 깃발은 'VJ 밸류젯'이라는 인쇄기로 제작됐다. 인쇄기 제조업체는 일본 무토(武藤)사. 1952년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회사다.



조선일보 A12면
3일의 약속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