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아일체' 시대… 여행 중 방전, 숙박·지도·번역 앱 올스톱 공포

김미리 기자
입력 2019.07.20 03:00

[아무튼, 주말]
강력해진 방전 공포 설문 조사 해보니

일러스트= 안병현
#1. "바르셀로나에서 꼭 봐야 한다는 '몬주익 분수 쇼'를 보고 호텔로 들어갈 때였어요. 지하철에서 내려 구글맵을 켰는데 배터리가 방전된 거예요. 밤 10시가 넘어 깜깜했는데 지리는 전혀 모르겠고 번역 앱이 안 되니 말도 안 통하고. 몇 시간 헤매다 겨우 숙소를 찾았는데 국제 미아가 이런 건가 싶더군요." 정은영(42)씨는 몇 년 전 스페인 여행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2. 조영진(23)씨는 2년 전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경유하며 겪은 일을 잊지 못한다. 비행기 갈아타기 전 3~4시간 동안 암스테르담 시내를 구경하겠다는 야무진 꿈은 방전 탓에 악몽으로 돌변했다. "짧은 시간 효율적으로 돌려고 '안네 프랑크의 집' 등 여행 동선을 촘촘하게 짜놨는데 시내에 들어가자 배터리가 나갔어요. 손목시계가 없어 시간도 모르겠고요. 관광은커녕 공항 돌아가는 길 찾느라 '멘붕'이었어요."

이른바 '폰아일체(물아일체에 빗대 휴대폰과 내가 일체된 상태를 일컫는 신조어)'의 시대. 배터리 방전은 곧 일상 방전으로 이어진다. 작년 영국 케임브리지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노모포비아(nomophobia)'를 꼽았다. '노 모바일 폰 포비아(no mobile phone phobia)'의 줄인 말로,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불안·초조를 뜻한다. 스마트폰 분리불안이다.

대표 증상이 '방전(放電) 패닉'. 스마트폰 배터리가 나갔을 때 겪는 혼란이다. 특히 휴가철 스마트폰 하나 믿고 홀가분하게 떠났다가 배터리 방전 때문에 진땀 쏙 뺀 이들이 많다. '아무튼, 주말'이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이용해 20~60대 전국 성인 남녀 2558명을 대상으로 관련 설문을 했다.

배터리 50% 남아도 가슴 벌렁벌렁… 방전 노이로제

직장인 김민정(43)씨는 '완충(완전 충전)' 강박이 심하다. 콘센트가 있으면 반사적으로 충전기를 꽂아 100% 충전한다. 스마트폰이 꺼져 거래처 전화를 놓치는 바람에 수천만원짜리 계약이 날아간 뒤로부터 생긴 버릇이다. "배터리가 1%에서 간당간당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 나요. 차 기름이 바닥난 상태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어요." 김씨는 "그때 이후 배터리 표시가 꽉 채워진 걸 봐야 맘이 놓인다"고 했다.

당신은 휴대폰 배터리가 몇 % 남았을 때부터 불안해지는가. 설문 결과, '30% 남았을 때'라고 말한 응답자가 35.0%로 가장 많았다. '50% 남았을 때'라고 답한 응답자가 24.2%로 그다음. '절반이나 남았다'는 안도보다 '절반밖에 안 남았다'는 불안이 앞서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

막연한 심리적 불안이 아니다. 10명 중 4명(42%)꼴로 '스마트폰이 방전돼 업무나 일상에 심각한 차질을 빚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응답자 A(여·23)씨는 "창고 정리를 하러 갔다가 누가 문을 닫고 나갔는데 휴대폰이 방전되는 바람에 한참 갇혀 있었다"고 했다. B(남·46)씨는 "대리 운전을 하는데 손님한테 가는 도중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중간에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고 말했다. 방전은 일상의 실핏줄까지 마비시켰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지난 2016년 LG전자가 미국 소비자 2000여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에서 응답자 10명 중 9명이 '배터리 방전 증후군(low battery anxiety)'을 앓는다고 했다. 증상은 타인의 충전기를 몰래 빌린다, 모르는 사람에게 배터리 충전을 부탁한다, 충전하려고 바나 레스토랑에 간다 등이었다.

해외여행, 여권보다 휴대폰

"비행기 티켓은 모바일 탑승권, 호텔 숙박 정보는 숙박 앱에 저장해요. 의사소통은 번역 앱으로, 길은 구글맵으로 찾아요. 우선순위를 따지면 여권보다는 휴대폰이죠." 대학생 김영진(21)씨 얘기다. 그는 이번 여름 유럽 여행을 앞두고 보조 배터리 두 개와 고속 충전 어댑터부터 주문했다.

'여권, 비행기표, 지갑.' 전통의 해외여행 준비 3종 세트가 바뀌었다. 요즘은 '휴대폰, 충전기, 보조 배터리' 3종 세트가 기본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 반드시 챙기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복수 응답)에 '휴대폰'(89.1%)이 근소한 차이로 '여권'(88.0%)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여행에서 정보를 구하고 길을 찾는 수단'으로도 휴대폰이 69.8%로 압도적 1위. 그다음이 가이드북(14.3%), 인포메이션 센터(8.9%), 종이 지도(6.8%) 순이었다. 세대 차가 뚜렷하다. 20대는 82.7%가 휴대폰이었고, 종이 지도를 본다는 응답자는 4%밖에 안 됐다. 밀레니얼 세대인 직장인 이영민(29)씨는 "대학생 때인 2010년 처음 해외여행을 갔는데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봤다"며 "종이 지도로 여행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반면 60대는 휴대폰 55.6%, 가이드북(19.7%)·인포메이션 센터(13.7%)·종이 지도(10.8%) 등 아날로그 방식이 44.2%였다. 정보를 디지털과 아날로그에서 절반씩 얻고 있었다.

모든 것이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되는 세상은 뒤집어 보면 스마트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이란 얘기다. 낯선 땅에서 겪는 방전 패닉은 강도가 더 세다. 응답자 25.3%가 여행 중 휴대폰이 방전돼 낭패를 봤다고 답했다.

배터리 동냥

충전기는 생명줄, 콘센트는 오아시스다. 54.8%가 '충전기나 보조 배터리를 늘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20대는 63.5%가 그랬다. 배터리 방전 앞엔 얼굴도 두꺼워진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충전기나 보조 배터리를 빌려본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12.9%였다.

우리와 사정이 다른 외국에서 방심했다가 당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최근 런던에 출장 간 양지은(32·가명)씨는 휴대폰을 충전하려고 번화가인 나이츠브리지역 스타벅스를 찾았다가 당황했다. 자리마다 콘센트가 있는 한국 스타벅스와 달리 매장에 있는 콘센트는 단 한 개. 이미 노트북 이용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직원한테 콘센트가 또 없느냐고 물었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는 커피 파는 곳이에요." 프레 타 망제, 코스타 등 주변 프랜차이즈 식음료 매장을 돌았지만 콘센트는 없었다. "내 배 채우는 것보다 휴대폰 배 채우는 게 더 급했어요. 한국이 전기 인심 후한 나라란 걸 새삼 깨달았어요."

나라마다 다르지만 공공장소나 식당에 일반인들이 쓸 수 있는 전기 콘센트가 없는 나라도 많다. 지난 2017년 런던에선 한 남성이 지하철 차량 안에 있는 콘센트로 8~9분 정도 휴대폰을 충전했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청소부들이 쓸 전기를 훔쳤다'는 이유였다. 일본에선 회사 콘센트로 스마트폰 충전을 금지하는 경우도 많다. 개인 용도로 회사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휴가지에서 삶을 충전하려면 배터리부터 빵빵하게 충전해야 하는 시대다.

따뜻하게 하면 충전 빨라져… 60도 이상은 배터리 손상될 수도

― 배터리 권위자가 알려주는 팁
70~80% 충전해야 수명 길어져… 꺼진 채로 오래 두면 수명 단축


배터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충전하고 덜 쓰는 방법은 없을까. 배터리 권위자인 한국전기연구원 차세대전지연구센터 도칠훈 박사(한국전지학회 회장)에게 배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물었다.

―배터리 소모량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액정 화면 밝기를 어둡게 하는 건 일반적으로 안다. 아예 배경 화면을 검정 계열로 하면 화면 소비 전력량이 준다. 예컨대 눈부신 바다 사진보다 어두운 밤하늘 사진이 전기 소모가 적다. 내 경우 홈 화면, 잠금 화면 모두 검정으로 하고 글씨를 하얀색으로 했다."

―배터리를 완전 방전하면 수명이 준다던데?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리튬이차전지는 완전 방전하면 수명이 짧아지긴 한다. 완전 방전하면 전자를 주고받는 '집전체'라는 구성회로 손상이 가속화돼 배터리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대폰상에는 0%라고 표시돼도 전지 전압은 '0볼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0%로 나와도 2.7 볼트 수준이 되도록 장치를 해놨다. 완전 방전은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꺼진 상태로 오랫동안 두면 완전 방전이 되기 때문에 배터리 수명이 줄어든다. 적어도 약 10%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 충전하는 것이 좋다."

―급속 충전은 배터리 수명을 짧게 한다던데.

"급속 충전은 전류를 많이 내도록 출력을 크게 한 장치다. 높은 전류로 빨리 전지를 충전하면 표면에는 전자가 저장되는데 안쪽에는 전자가 저장이 안 될 수 있다. 전극 재료 안에 농도 편차가 생겨 배터리 성능이 떨어진다. 뜨거운 유리를 찬물에 집어넣으면 깨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현재 일반적인 배터리 기준으로 10~15분 만에 완전 충전된다는 급속 충전기는 안 쓰는 게 좋다."

―충전을 조금이라도 빨리하는 방법이 있나.

"따뜻한 곳에서 충전하면 화학반응 속도가 빨라지고 배터리 내부 저항이 감소해 충전 속도가 좀 빨라진다. 보통 온도가 10도 높아지면 반응 속도가 2배 정도 빨라진다. 스마트폰 온도가 30~40도일 때 충전이 빨리 된다. 따뜻한 손으로 감싸고 있어도 좀 빨라진다. 다만 60도 이상은 배터리가 손상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100% 충전됐는데 계속 꽂아둬도 되나.

"외출하는데 배터리를 많이 쓸 것 같으면 충전이 다 되었다고 하더라도 1~2시간을 더 충전기에 꽂아두는 게 좋다. 100% 충전됐다고 막 떴을 때 실제로 전지 안은 80~90% 정도 충전 됐다고 보면 된다. 전지 표면이 100%, 안쪽은 80~90% 정도 충전된 것이다. 1~2시간 더하면 안쪽까지 고루 충전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배터리의 수명을 생각했을 때는 70~80%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밤에 계속 꽂아두고 자도 되나.

"정품 충전기를 꽂으면 문제없다. 충분히 차면 전류가 더 이상 전지 안으로 안 들어간다."
조선일보 B3면
트래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