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느·마가렛 위해 뛰는 김황식 전 총리

김효정 기자 soboru@chosun.com
입력 2019.07.21 06:53 수정 2019.07.21 06:57

[주간조선]

‘푸른 눈의 소록도 천사’라고 말하면 떠오르는 간호사들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85)와 마가렛 피사렉(Margaritha Pissarek·84)이다.

두 사람은 1960년대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가서 근 40년을 소리 없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월급도 받지 않았다. 잘못된 사회 인식 탓에 모두가 닿기를 꺼려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간호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평생 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70대가 될 때까지 봉사하며 살았던 이들의 삶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되레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나서의 일이다. 2005년 11월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져 소록도에 불편을 주기 싫어 떠난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빈자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김황식 전 총리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노벨평화상 서명에 94만명 동참
그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 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 범국민 추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다. 위원회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마리안느·마가렛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올리기 위해 서명을 받고 있는데 벌써 94만명의 인원이 서명에 동참했다. 왜 우리는 마리안느·마가렛을 기억해야 할까.

이들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제헌절인 지난 7월 17일 서울 강남구 호암재단 이사장실에서 김 전 총리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영웅’이 부족하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존경할 만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롤모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황식 전 총리 역시 이 점을 먼저 지적했다.

“부를 얻고 권력을 쟁취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런데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가치’를 실천한 사람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마리안느·마가렛 간호사는 드물게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가치 있는 삶을 살며 우리 사회의 부족한 점을 채워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김 전 총리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이다.

“우리가 간과하기 쉽지만 사랑은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때 내걸었던 세 가지 이념을 떠올려봅시다.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博愛)입니다. 사랑이죠. 사랑은 곧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자유와 평등도 이뤄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사랑이 부족하지요. 그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마리안느·마가렛입니다.”

단지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가 소록도에서 오랜 시간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해서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40년 동안 그들이 보여줬던 사랑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알리고자 하는 것에 이 운동의 목적이 있다는 얘기다.

“궁극적인 목표야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내년에 당장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들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림으로써 우리가 깨닫게 되는 가치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의 직업정신도 그중 하나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는 원래 수녀가 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꼭 수녀가 되지 않아도, 세속에서 종교적 가치를 실천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걸 해내려고 평생 노력을 했습니다. 종교적 가치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이상적인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 역시 이상향에 가까워질지도 모릅니다.”

헌신에 대한 고마움이 부족한 사회
김 전 총리는 마리안느·마가렛 간호사를 알리기 위해 싱가포르에도 다녀왔다. 그는 지난 6월 열린 국제간호협의회(ICN) 학술대회의 기조연설자로 참여해 전 세계 간호사들에게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일생에 대해 알리고 왔다.

“연설 말미에 5분 정도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소개하는 영상을 참석자들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연설이 끝나자 세계 140여개국에서 온 수많은 참석자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더군요. 행사장에 설치된 부스에는 2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와서 서명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사무총장도 직접 서명했습니다.”

마침 2020년은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탄생 200주년으로 세계보건기구에서도 ‘간호사의 해’로 지정한 해다.

“환자를 가장 가까이서, 언제나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 간호사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간호사를 보조하는 사람으로 폄하하곤 하죠.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보십시오. 묵묵히 헌신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사회 원로로서 김황식 전 총리가 간호사의 정신을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타인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제대로 조명하는 일은 사회 전체를 봐서도 중요한 일이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며 살아가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아는 사회. 지금 우리 사회에 부족한 점이다.

“아마 100만명 가까운 국민들이 기꺼이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겁니다. 사실은 목이 말랐던 겁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지요. 헌신하고 사랑하며 베풀 줄 아는 삶, 그리고 그런 삶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서명하는 일은 그런 사회를 만드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황식 전 총리 개인적으로도 이번 서명운동과 추천위원회 활동은 의미가 있다.

“총리 재임 시절에 중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많이 다녔습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 중 하나가 제가 가는 어느 곳에서든 한국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농업교육을 하거나 의료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역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40년 전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도움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는 베풀 줄 아는 국가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 혼자서 해낸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만큼 베풀 줄도 알아야 하고요. 우리가 한국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다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됐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노벨평화상 추천 운동은 한국 사회에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랑과 헌신의 삶의 가치를 되살리는 게 필요한 모든 국제사회에 전파되어야 하는 일이다. 1979년 테레사 수녀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남긴 말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역시 ‘사랑’이다.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그 정신은 테레사 수녀가 평생 헌신했던 알바니아와는 한참 떨어진 한국에서도 실천되고 있었다.

“어느샌가 사랑과 헌신이라는 단어가 수식어가 된 지금,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알리면서 다시금 그 가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고 채워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효성 탄소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