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PC 종료, 김대리의 비밀 야근작전

최아리 기자 이관용 인턴기자(한양대 사학과 졸업)
입력 2019.07.19 03:39

52시간제 도입된 상당수 기업, 퇴근시간 되면 컴퓨터 강제 종료
직원들은 남은 업무 처리하려 랜선뽑아 시계 오전으로 맞추고 근태관리 해킹프로그램 돌려 써

11일 오후 서울시내 식품·콘텐츠 대기업의 한 계열사 사무실. 한 직원이 "4시 50분입니다"라고 하자, 팀원들이 일제히 업무용 PC 내장 시계를 '10일 오전 시간대'로 맞췄다. 그리곤 인터넷 연결선(랜선)을 뽑은 뒤 PC를 껐다가 다시 켰다. 다시 켜진 컴퓨터의 시계는 여전히 10일 오전. 직원 A씨는 "인터넷을 끊으면 PC는 시간을 인식 못 한다"며 "매월 초 결산을 하거나 본부 보고용 보고서를 만들 때마다 이 짓을 한다"고 했다. 방법은 본사에서 온 기획팀 임원이 알려줬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 자정까지 일하다 퇴근했다. PC 속 시계는 10일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週)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된 기업에서 야근하기 위한 직원들의 각종 꼼수가 속출하고 있다. 상당수 기업은 올해 들어 주 52시간제 위반에 따른 '사업주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해 'PC오프(off)' 제도를 도입했다. 매일 정해진 퇴근 시간이 되거나, 주간 근무 시간이 '52시간'에 도달하는 순간 직원 PC가 강제로 꺼지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직장인들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이를 우회하는 것이다.

/그래픽=양진경
한 전기업종 대기업 계열사에서는 직원들이 근무시간 관리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해킹 프로그램'을 돌려 쓴다. 외부로부터의 개인 PC 내장 시계 접근을 차단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부서는 해외 고객과 연락을 담당하기 때문에, 시차(時差)로 인해 야근하는 일이 잦다. 이 회사 3년 차 사원 B(31)씨는 "사내 엔지니어가 개발했다고 들었는데, 너도나도 야근이 필요하다 보니 알음알음 프로그램이 퍼졌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측이 최근 해킹 프로그램 단속에 나섰다. 그러자 일부 직원은 아예 PC를 포맷해 회사가 강제로 깔아놓은 PC 오프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있다고 직원들은 전했다.

'공용 PC'를 활용하는 곳도 많다. 사무실 내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여분의 PC를 야근용으로 돌려 쓴다. 공용 PC는 개인용이 아니기 때문에 근무 관리 프로그램이 깔리지 않은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유통 대기업 계열사 C사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 상품기획자 D(29)씨는 "여러 명이 단체 야근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PC 내 '시간 설정 파일'을 삭제하는 방법도 있다"며 "월말 회계 결산, 회의 보고 자료같이 품이 많이 드는 업무를 할 때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또 다른 유통 대기업 계열사 직원들은 PC 오프 프로그램의 '오류' 두 개를 찾아냈다. 직원 E씨는 "회사가 강제로 PC 오프 프로그램을 깔았지만, 이를 '재설치'하도록 한 뒤 중간에 취소시키면 당일 해당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다"며 "프로그램 내 '연장근무 신청' 버튼을 미친 듯이 연속으로 눌러 프로그램을 마비시키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이 회사는 지난달 이런 오류를 수정한 새 프로그램을 개발해 배포했다.

신형 운영체제(OS)에서 답을 찾기도 한다. 모 금융그룹 계열사 직원들은 MS(마이크로소프트) '윈도10'의 '새 데스크톱 추가하기' 기능을 활용한다. 1대의 PC 안에 가상의 PC 여러 대를 만들어 다른 PC처럼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이다. 직원 F씨는 "프로그램이 깔린 '데스크톱 1'은 시간이 되면 잠기지만, 추가한 데스크톱 2에서 계속 작업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대기업 계열 홈쇼핑 회사에서 최근 퇴사한 조모(27)씨는 "인사팀에 신청해 예외적으로 컴퓨터를 무제한 쓸 수 있는 '패스키'를 한 명이 받은 뒤 팀원 모두가 같이 썼다"고 했다. 그는 "야근 수당도 신청 못 하는 공짜 야근을 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직장인 커뮤니티앱 블라인드가 주 52시간 적용 직장인 1만187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 36%가 '꼼수로 편법 야근을 하거나 임금이 줄었다'며 주 52시간이 악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조선일보 A14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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