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인종·이민자의 나라 부정… 트럼프의 '뉴노멀 아메리카'

정시행 기자 이옥진 기자
입력 2019.07.17 03:32

논란 부추겨 재선 카드로 활용 "싫으면 미국 떠나라" 다시 강공

정부 정책에 반대한 유색인종 야당 여성 의원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인종차별 폭언을 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동맹국 영국과 캐나다·뉴질랜드에서까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다인종·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노골적인 인종 혐오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당인 공화당에선 이렇다 할 비판 없이 침묵하거나,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만큼은 초당적으로 대응해온 미 정계의 오랜 문법이 깨진 것이다. 극렬 지지층에 기대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 밑에서 가치관이 무너지고 분열이 고착되는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이 도래했다는 지적이다.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와 일한 오마르, 라시다 틀라입, 아이아나 프레슬리 등 하원의원 4인방은 15일(현지 시각) 워싱턴 연방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트럼프 발언은 반인권적 이민 정책의 결함을 가리려는 연막 작전"라며 "인종주의 획책이라는 미끼를 물지 말라"고 했다. CNN은 "트럼프가 미국이 자랑스럽게 여겨온 '멜팅폿(인종 용광로)' 원칙과는 다른 미국을 창조하고 싶은 것"이라며 "반(反)미국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민자 비중이 높은 서방의 동맹국에서도 비판이 터져나왔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15일 각각 "용납할 수 없는 일" "절대 동의 못한다" "다양성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힘"이란 성명을 냈다.

'영국의 트럼프'로 불리는 보리스 존슨 보수당 대표 경선 후보조차 "현대 다인종 국가에서 용납할 수 없는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했고, 중국계 아내를 둔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은 "누군가 내 아이들에게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끔찍할 것"이라고 했다. 각국 네티즌은 #RacistInChief #Racistpresident 등 트럼프를 인종주의자로 비판한 해시태그를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더 세게 나왔다.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미 제조업계 격려 행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민주 4인방은 미국을 증오하는 이들"이라며 "정부 정책에 계속 불만이면 떠나도 된다"고 비꼬았다. '인종주의자'란 비판엔 "내게 동조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신경 안 쓴다"고 말했다.

이날 취재진이 놀란 것은 트럼프가 아니라, 여기 모인 여당 관계자와 기업인의 모습이었다. 대통령의 유색인종 비하에도 박수가 이어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는 강간범'이라고 하자 이미지를 중시하는 기업들이 트럼프 측 거래를 끊었고, 2016년 여성 성추행을 자랑했을 때는 공화당의 상당수가 분노하며 지지를 철회했었다"면서 "지난 3년간 트럼프의 수혜를 입은 여당과 대기업, 교계 등이 폭력과 선동을 수긍하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탐탁지 않아 했던 공화당 주류의 변화가 극적이다. 트럼프의 14일 트윗 후 이틀이 지나도 여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 등 대다수가 침묵만 지켰고 "트윗 못 봤다" "트위터엔 논평 안 한다"고 발을 뺐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4인방이 공산주의자에다 반미적인 것은 사실"(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그들이 떠난다면 비행기 값을 대주겠다"(랠프 에이브럼 하원의원)는 '트럼프 충성 맹세'까지 나왔다. 일부 의원이 "반통합적 발언" "인종차별 모욕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했지만 소수였다.

이에 대해 영국 일간 가디언은 "공화당에 원래 백인 우월주의자의 정서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공화당이 트럼프의 당이 됐다'고 표현했다. 인터넷 매체 복스도 '트럼프의 인종주의 공격에 대한 공화당의 침묵이 귀를 먹게 할 정도다'는 기사에서 공화당이 어떻게 '트럼프화(Trumpfied)'됐는지 고발했다.

NYT는 '공화당의 트럼프화' 이유를 트럼프의 '공포 정치' 때문으로 해석했다. 정부·의회의 누구든 트럼프에 맞서려 하면 그의 트위터로 실시간 모욕을 당하고, 극우 매체의 융단 폭격을 받다 보니 모두 쉬쉬하며 몸조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매체 복스는 공화당을 침묵하게 하는 '트럼프의 힘'에는 핵심 지지층의 확고한 결집력이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에 대한 미 국민 전체의 지지율 평균(40%)은 80여 년간 역대 대통령 지지율 평균(53%)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공화당 지지자들 내에서만 따지면 트럼프 지지율은 줄곧 80~90%대를 오간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승전을 이끈 아이젠하워(94%)나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95%) 전 대통령의 전적에 견줄 정도다. 특히 최근에는 90%로 굳어지면서 공화당의 '트럼프화'를 증명하고 있다.


조선일보 A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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