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제빵사에서 스타 가수로… "문 하나 닫히니 새로운 문 열렸죠"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김경은 기자
입력 2019.07.15 03:00

마르틴 허켄스… 30년간 빵 굽다가 50대에 실직
TV 오디션 프로그램 '갓 탤런트' 우승하며 네덜란드 국민 가수로

진눈깨비 내리던 날이었다. 2010년 크리스마스 이브. 네덜란드 남부의 소도시 마스트리히트 한복판에 초로(初老)의 사내가 섰다. 오가는 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그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 "힘들어 내 영혼이 너무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내 마음이 무거울 때, 난 고요히 여기서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을 때까지…." 그의 이름은 마르틴 허켄스(66)였다.

그해 가을 네덜란드에선 '허켄스 광풍'이 불었다. TV 오디션 프로그램 '홀랜드 갓 탤런트'에서 무명(無名)에 실직한 반백의 사나이가 오페라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설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불러 더 유명한 이 곡은 테너에게는 극한의 고음과 완벽한 호흡을 요하는 난곡. 그러나 평생 음악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허켄스는 곡진한 미성(美聲)으로 청중의 가슴을 울리며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지난 6일(현지 시각) 마스트리히트 바로 그 거리에서 만난 허켄스는 "방송국에서 처음 연락 왔을 땐 내가 설 자리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까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네덜란드 남부의 소도시 마스트리히트 중심가에서 ‘유 레이즈 미 업’을 불러 전 세계를 울린 마르틴 허켄스. 그는 “나라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지 볼 때마다 새롭지만, 내가 부르는 노래에 감동하는 건 놀랍도록 비슷하다”며 “영어를 몰라도 노래에 담긴 메시지는 정확히 알아듣기에 온몸으로 받아들이더라”고 했다. /김경은 기자
마스트리히트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쉰벨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일곱 살 때 친구를 따라 합창단에 갔다가 단원으로 뽑혔다. 노래라곤 동요 몇 소절 아는 게 전부였지만 두 달여 만에 그는 합창단의 솔로이스트가 됐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아베 마리아'를 부르면 어른들은 "어쩜 그렇게 잘 부르냐"며 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열네 살 때 변성기가 왔다. 가난한 시골집 9남매 중 막내였기에 레슨은 엄두도 못 냈다. '파바로티처럼 멋진 테너가 되겠다'던 꿈을 그렇게 접었다.

생계를 위해 스물세 살 때부터 시작한 제빵사 생활. 하루 열두 시간씩 32년간 매일 빵을 구웠다. "고단했지만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하지만 불과 쉰다섯에 해고 통보를 받았고, 그는 거대한 벽이 자신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와 부딪히는 환영에 시달렸다. 기회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둘째딸 나딘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몰래 아빠 이름을 올렸다. 시청자들은 그를 '파파로티(파바로티+아빠)'라 불렀다. 마스트리히트 지역 방송국 L1은 카메라 한 대만 놓고 그가 거리에서 '유 레이즈 미 업'을 부르는 장면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동영상은 중국에서만 첫 주에 100만 뷰를 찍으며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유럽과 미 대륙은 물론 대만과 일본에서도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지금은 총 조회수 2395만회를 넘겼다.

2010년 크리스마스 이브, 마스트리히트 거리에서 ‘유 레이즈 미 업’을 부르고 있는 허켄스. /유튜브 캡처

그는 "문 하나가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게 삶이더라"고 했다. "만약 내가 실직하지 않았으면 프로그램에 나갈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난 비로소 인생의 아이러니에 전율했지요." 독일의 한 유명 모델은 오스트리아 백만장자와 베네치아의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다른 테너 다 필요 없고 마르틴 당신만 와서 노래해 주면 된다"고 청했다. 대만에서 지진으로 수십 명이 사망했을 땐 1만 관객과 '유 레이즈 미 업'을 부르며 울었다. "30대 호주 여성을 잊을 수 없어요. 암에 걸린 모친이 내가 부르는 '유 레이즈 미 업'을 들으며 완치를 했는데 불행하게도 재발했다면서 마지막으로 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는 집에 스카이프를 설치해 시드니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있는 환자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마음과 마음이 닿은 순간이었어요. '유 레이즈 미 업'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이죠. 절망한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니까요." 허켄스는 "기다리고 기다리면 문은 언제고 열린다"며 "나는 행복한 마르틴"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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