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제로·文케어·탈원전… 부메랑이 된 약속

박돈규 기자
입력 2019.07.13 03:00 수정 2019.07.15 10:25

[아무튼, 주말]
공약으로 얻은 표… 청구서 돼 돌아와

전국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이틀째인 지난 4일 인천시 구월동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열린 '공공부문 비정규직 파업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호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요금수납원들이 톨게이트 진입로를 막았다. 지난 4일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서울요금소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6개 차로를 2시간 동안 점거해 출근길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0)'라는 대통령 지시 1호는 2년 만에 이렇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요금수납원 6500명 중 민노총과 한노총 소속인 약 1500명은 "자회사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한국도로공사 방침에 "직접 고용!"을 외치며 반발하고 있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도 덜컹거린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노동계와 경영계가 격론을 벌인 끝에 올해(8350원)보다 2.9% 오른 8590원으로 결정됐다.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지난 2년간 최저임금 과속 인상(6470원→8350원)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가 감당하기 어려웠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충남 공주에 이어 전남 나주시의회는 해당 지역 보(洑) 철거를 반대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12명 전원은 "국비 1635억원으로 지은 죽산보를 1년간 생태 모니터링을 하고 다시 250억원 들여 철거하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대선 공약이자 환경부 방안인 '4대강 보 철거'가 현장에서 가로막힌 것이다.

탈(脫)원전, '문재인 케어(건강보험 보장 확대)', 주 52시간 근로제…. 도처에서 파열음이 들린다. 표심을 잡아준 공약이 이젠 정부를 역공한다. "약속을 지키라"는 청구서가 날아오거나 "현실을 인정하고 약속을 거둬들이라"는 저항에 부닥친다. 집권 3년 차 대통령은 공약의 지뢰밭을 걷고 있다.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거는 공약이 많다"며 "정부를 맡았다면 국익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책 수정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공약

지난 3~5일엔 초·중·고 3600여 교에서 '급식 대란'이 일어났다. 급식조리원, 교무보조원, 돌봄교실 전담사 등 학교 비정규직 5만2000여 명이 민노총 파업에 동참해 기본급 6.24% 인상, 정규직과 같은 복리후생비 지급을 요구했다.

바른 소리도 남을 괴롭히면서 하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급식조리원은 학생 끼니를 팽개쳤고 요금수납원은 출근길을 방해했다. "각목이나 쇠파이프 대신 시민을 불편하게 하는 '사회적 폭력'이 등장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노총은 오는 18일에도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했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 앞에서 한 약속을 저버렸다"며 '청와대가 책임지라'는 머리띠를 다시 묶고 있다.

반대로 "공약을 폐기하라"며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다. '천지원전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8일 청와대 앞에서 탈원전 반대 집회를 열었다. 경북 영덕에 건설하려다 백지화된 천지원전 예정지 주민 등 200여 명은 "낙하산으로 내려온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원전 건설 종결을 선언하고, 산업부는 절차를 무시한 영덕군수의 공문을 근거로 원전 고시 지역 해제를 예고해 국민주권을 침탈했다"며 "사회적 합의 없이 공약으로 밀어붙인 망국적 탈원전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로 발전 비용은 증가하는데 여름철 전기료 할인 '약속'을 지키느라 한전 적자는 커져만 간다.

자동차가 연료 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을 무시하고 계속 달리면 어떻게 될까. 7년 연속 흑자이던 건강보험 재정은 공짜 심리와 과잉 진료 급증으로 작년에 1788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노인이 늘고 생산연령인구는 줄어든다는 점에서 청년 세대에겐 "뒷감당은 너희가 하라"는 재앙과 같다. 결국 건보료 인상으로 구멍을 메우려 할 것이다. 의사 박모(45)씨는 '문재인 케어'에 대해 "의사들은 '포퓰리즘에 혈안이 된 얼치기 아마추어 정부의 작품'이라고 비웃는다"고 했다.

"포퓰리즘이 가장 위험하다"

대선 공약은 크게 두 부류다. 정권을 잡으면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이 하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득표 전략이 다른 하나다. 김중권 전 비서실장은 "이기려고 선심성 약속을 남발하는 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라면서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공약은 과감히 수정해야 하고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그는 "유권자는 대선 후보의 모든 정책을 점검하고 표를 준 게 아니다.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등 문제가 많은 정책은 '국익을 위해 수정하겠다'며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학자인 이재열 서울대 교수에게 한국은 불신·불만·불안이 팽배한 '3불(不) 사회'다. 불신은 제도를 믿을 수 없었다는 경험 때문이고, 불만은 눈높이가 높아져 웬만한 성취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닥쳐올 미래, 특히 노후 준비가 안 돼 있어 불안하다.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는 고도성장과 함께 중산층에 올라탈 수 있었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사회가 되면서 문은 닫혀버렸다. 이재열 교수는 "1990년대 초 대학 숫자와 정원이 폭증하면서 20여 년 뒤 지금 청년들이 취업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정치적 포퓰리즘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경제적 효능을 무시하고 정치적으로 쉬운 선택을 하면 미래를 저당 잡힐 수 있다는 경고다.

양극화가 심해지자 분노가 시대정신이 됐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이미 2008년에 "우리나라가 헝그리(hungry) 사회에서 앵그리(angry)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런 세상엔 포퓰리즘이 비집고 들어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탄핵 이후 대선 정국에서는 좌절한 민심을 명분으로 적폐 청산 등 분노를 활용한 공약이 쏟아졌다.

수정은 현명하다는 증거

독일 기본법은 1949년부터 지금까지 60번 수정됐다. 치욕적인 숫자가 아니라 현명하다는 증거다. 수정하는 능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불행 피하기 기술'을 쓴 지식경영인 롤프 도벨리는 "사람들은 설정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수정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며 "완벽한 계획이란 없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고쳐나가야 한다"고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대선 공약을 수정하거나 파기한 사례는 적지 않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해 사과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과 농가 부채 탕감 공약을 포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도 이전 약속으로 충청표를 흡수했지만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공약을 폐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원' 공약을 파기했다.

문재인 정부 공약 761건의 이행 상황을 보여주는 문재인미터(moonme ter.kr)에 따르면 적폐 청산 등 450건(59%)은 진행 중이고, 5대 중대범죄 양형 강화 등 145건(19%)은 지체돼 있다. 청와대 국가재난컨트롤타워 역할 등 98건(13%)은 완료했고, 대통령 고위공직자 임용 기준 강화 등 14건(2%)은 파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애초부터 포퓰리즘으로 의심받은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 공약을 올해 초 백지화했다. 정의당마저 "대통령 공약(公約)이 실현 불가라는 공약(空約) 판정을 받았다. 국민은 속이 쓰리다"고 비판했지만, 현실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멈추는 편이 낫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방송 대담에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했지만 무조건 그 속도로 인상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담을 준 부분이 적지 않았다면 최저임금위원회가 적정선으로 판단할 것"이라며 속도 조절을 내비쳤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안 그래도 불황인데 최저임금을 높이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고용이 위축된다는 사실을 이제 정부도 안다"며 "취지를 살리면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정밀하게 검토해야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피가 끓어오르면 함부로 맹세하는 법이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폴로니어스가 딸 오필리어에게 한 말이다. 햄릿의 구애를 과신하지 말라는 경고지만, 대선 후보와 유권자 사이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함부로 공약하지 마라. 함부로 믿지도 마라.


[트럼프의 反이민주의·문재인의 위안부 합의 파기… '값싼 정의'는 역풍 불러]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중산층 이하 백인 계층 내면에 자리한 민주당 8년 집권의 염증을 반(反)이민주의와 보호무역주의라는 일회성 대증요법으로 치료하겠다고 나섰고, 결국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이른바 ‘값싼 정의(cheap justice)’의 승리였다. 하지만 분노와 복수심에 기댄 공약과 정치는 역공을 부를 수 있다.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9월 2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의 한 호텔에서 굳은 표정으로 회담하고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견으로 충돌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
지금 우리나라 발등에 떨어진 불은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5년 한·일 양국은 화해치유재단을 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문재인 정부는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이 이어지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은 약속을 깨는 국가”라며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들어갔다.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문 대통령의 올해 3·1절 기념사를 듣고 걱정부터 했다. 그는 “‘친일(親日)’과 ‘빨갱이’는 대통령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단어였다”며 “밑에 있는 정책 입안자들은 그런 말을 한두 번 던져보고 여론을 가늠할 수는 있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뱉어버리면 주워담을 수 없는데 그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정치학자로 꼽히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 기념사를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 tionalism)’라고 비판했다. 한국국제정치학회가 개최한 학술대회 발제문에서 그는 “친일 잔재와 보수 세력을 은연중에 결부시키며 이를 청산해야 한다는 대통령 연설은 역사를 굉장히 좁은 각도로 해석한 것으로 사려 깊지 못한 표현이자 발상”이라며 “정부가 일제 청산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위선이고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획일 뿐”이라고 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는 청구권 협정이 들어 있다. 강제 징용자(103만여 명) 개인 청구권에 대해 ‘나라로서 청구하며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명시했다. 피해자 대신 받은 자금(5억달러)으로 한국 정부가 개별 보상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경제 개발에 투입하느라 피해자에게 돌아간 돈은 92억원에 불과했다. 2012년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해석해 한·일 관계의 시한폭탄이 됐다.

홍석철 서울대 교수는 “한국 경제에서 삼성과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다. 일본이 꺼낸 수출 규제는 사드 배치 당시 중국의 보복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며 “외교적 자존심을 세우다 국민이 피해 보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즉흥적으로 행동했다면 일본은 치밀하게 따져보고 내린 결정으로 보이는 것도 차이점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에 떠밀지 말고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B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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