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윔블던 러브] 윔블던서 페더러 보려고… 2박3일도 즐겁게 노숙

윔블던=양지혜 기자
입력 2019.07.08 04:42

추첨 응모하거나 줄서야 입장권
자리 비우면 대기 인정 못 받고 취사 금지돼 빵으로 때워

"어떻게 텐트에서 지내느냐고요? 황제를 알현할 기회 자체가 영광인데요."

프라밀라 추가니(52)씨는 영국 윔블던공원을 메운 텐트 군락의 앞줄에 있었다. 현지 시각 6일 오후 4시 45분에 열린 로저 페더러의 윔블던 남자 단식 3회전(32강) 경기를 보려고 4일 오후 3시부터 텐트를 쳤다. 대기 번호는 100번. 소설책 한 권을 읽고 또 읽는다. 런던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거리인 지브롤터에 사는데 아들과 10년째 여름 윔블던에 온다. 그는 "3회전이 끝나자마자 페더러의 다음 경기를 위한 줄을 설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가족 5명과 함께 온 아넷 드리센(59)씨는 3회전 당일 새벽 5시 공원에 왔다. 대기 번호는 7892번. 그는 "다른 그랜드슬램 대회도 가봤지만 윔블던은 정말 다르다. 줄 서는 광경에 압도당했다"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대회다. 아이들이 인내심을 배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기줄 맨 끝을 대형 깃발로 표시하는 자원봉사자는 "매일 텐트촌과 줄 서는 풍경이 있지만, 페더러가 나오는 날은 사람이 2~3배 더 많다"고 전했다.

돈 대신 시간을 바치는 줄 서기(Queue)는 윔블던 티켓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줄 이외엔 크게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6개월 전 우편 또는 온라인으로 입장권 추첨에 응모하거나 윔블던을 주최하는 올잉글랜드클럽(AELTC)의 회원일 것(전체 375명뿐이다), 롤렉스 등 후원사 몫의 티켓, 아니면 초청장을 받을 만큼 유명하거나 '로열 박스'에 앉는 귀족일 것, 또는 AELTC가 발행하는 5년 만기 채권을 사 티켓을 받는 것이다. 참고로 2021 ~2025년 채권은 10만파운드(약 1억5000만원)부터 거래 시작이다.

로저 페더러의 하얀 유니폼은 경기가 끝나도 보송보송하다. 네트 앞 발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선수인데도 바람 구두를 신고 달린 것처럼 땀이 안 난다. 반면 황제와 맞선 뤼카 푸유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1세트부터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페더러는 남자 단식 3회전 승리가 확정될 때 “컴 온(됐어)!” 딱 한마디를 외쳤고, 센터 코트의 기립 박수가 윔블던 하늘까지 울려퍼졌다. 이미지 크게보기
로저 페더러의 하얀 유니폼은 경기가 끝나도 보송보송하다. 네트 앞 발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선수인데도 바람 구두를 신고 달린 것처럼 땀이 안 난다. 반면 황제와 맞선 뤼카 푸유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1세트부터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페더러는 남자 단식 3회전 승리가 확정될 때 “컴 온(됐어)!” 딱 한마디를 외쳤고, 센터 코트의 기립 박수가 윔블던 하늘까지 울려퍼졌다. /AP 연합뉴스
윔블던엔 하루 4만명 이상 입장하지만, 센터코트 티켓은 선착순 500명에게만 주어진다. 특히 페더러 같은 수퍼 스타가 뛰는 날은 경쟁이 더 치열해 사흘 전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려야 한다. 노숙 조건도 까다롭다. 텐트는 최대 2인용. 안에 항상 사람이 있어야 대기번호를 인정받는다. 취사 금지여서 빵만 계속 먹고, 화장실 앞엔 늘 100여 명이 줄지어 있다. 그런데도 브라질·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와 '윔블던 텐트촌' 생활을 자처한다.

윔블던은 색깔도 다르다. 꼭 100년 전 짙은 녹색과 보라색 배경에 라켓 두 개를 그려넣은 공식 로고를 만들고선 강박적으로 이 두 색을 고집한다. 관중석과 경기장 덮개, 코트 가림막 등 대부분의 시설을 짙은 녹색으로 해놨고 자원봉사자 등 관계자 유니폼은 보라색이다. 센터 코트 외관에도 담쟁이덩굴에 철쭉과 수국, 초롱꽃 등 보랏빛이 감도는 꽃들을 죄다 심었다. '여기가 바로 윔블던'이라고 끊임없이 색으로 세뇌한다.

윔블던 센터코트엔 1만5000명이 입장 가능하지만, 경기 당일 줄 서기로 가능한 표는 선착순 500명뿐이다. 지브롤터에 사는 프라밀라 추가니씨는 로저 페더러를 보려고 3회전 경기 시작 50시간 전에 텐트를 쳤다고 한다. /양지혜 기자

예외는 흰색. 윔블던에 출전한 선수는 흰 옷만 입는다. 눈 부시는 햇빛에 반사된 흰 옷은 선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센터 코트에 나타난 하얀 페더러는 '테니스의 제우스'였다. 심판부터 관중까지 모두가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동전으로 서브 순서를 정하고 나서 페더러가 심판에게 악수를 청하자 그 심판은 허리를 숙였다. 선심(線審)들 입가는 하늘로 향했고, 페더러를 거드는 볼퍼슨(ball person) 얼굴은 경기 내내 발그레했다. 페더러와 겨뤄야 할 뤼카 푸유(25·프랑스·세계 28위)만 설레지 못했다.

황제의 테니스는 아름답다. 마이클 조던의 덩크슛과 타이거 우즈의 아이언샷이 아름다운 것처럼. 텐트 노숙으로 입장권을 얻은 관중은 피로가 밀려왔지만, 페더러가 아무도 생각 못한 각도와 방향으로 공을 1㎝ 오차도 없이 보내자 어느새 잠에서 깨 감탄사 "오(Oh)"를 연발했다. 온갖 나라말로 찬사가 나왔다. 영어로는 엄청난(tremendous), 아름다운(beautiful), 믿기 어려운(unbelievable), 초인적인(super human), 정교한(exquisite) 같은 단어들이 메아리쳤다. 어뢰처럼 뻗는 포핸드와 한 손 백핸드 궤적의 우아함, 기품 있는 서브, 사뿐사뿐 구름처럼 뛰는 스텝,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차분함. 페더러의 순간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갈채를 보냈다. '3차원 페더러'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경기는 2시간 6분 만에 끝났다. 페더러는 푸유를 3대0(7-5 6-2 7-6〈7-4〉)으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만 38세 생일을 한 달 남겨둔 이 스위스 남자는 통산 아홉 번째 윔블던 우승컵을 향해 간다. 추가니씨는 네 번째 텐트를 치러 공원으로 갔다.


조선일보 A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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