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근혜는 침묵 지켜선 안돼… 누명 쓴 자신의 부하들 지켜줄 의무 있어"

입력 2019.07.01 03:12

'국정원장의 눈물: 老人과 女王' 출간한… 이병호 前 국정원장의 변호인 엄상익씨

엄상익(65) 변호사는 국정원의 특수활동비 문제로 구속 수감됐던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변호인이었다. 그가 '국정원장의 눈물: 老人과 女王'이라는 제목의 변론기를 출간했다.

"일주일에 한 번 구치소 접견을 하면서 이병호 전 국정원장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국가 기밀의 범위를 안 넘는 선에서 그는 답변했지요. 출간 전에 원고를 미리 보여줬습니다."

―이병호씨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정원장(2015년 3월~2017년 6월)이었는데, 무엇이 가장 궁금했습니까?

"육사(陸士) 출신으로 그는 월남전에 참전한 적 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뒤 '정보맨'으로 살았습니다. 1996년에 정년퇴직했지요. 박근혜 정부가 은퇴한 지 20년이 지난 그를 불러낸 겁니다. 이미 75세 노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연세에 왜 맡았느냐?'고 물었지요. 그는 '북한과 마지막 전투를 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전투'라는 표현이 흥미롭군요.

"국정원 직원들 앞에서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위한 마지막 전투를 하자'라는 연설을 했다는군요. 정보기관은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군대와는 다르다며, 정보전(戰)에서 북한을 뒤흔들고 압박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김정은 정권을 무너뜨리고 교체해야 할 대상으로 봤습니다."

―문재인 정권에서 보면 수구 냉전·대결적 사고의 전형적인 인물이겠군요.

"저도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그는 '북한과 평화 공존이 될 거라고 보나? 절대 안 된다. 나는 국정원장을 하면서 김정은은 아니라고 봤다'고 했습니다."

―왜 김정은에 대해 그런 단정적인 판단을 했을까요?(이 글을 쓰는 동안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다. 많은 국민이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됐을 것이다.)

"국정원장 재직 시절 위성사진을 통해 김정은이 고모부를 죽이려고 준비한 말뚝을 봤다고 하더군요. 숙청 대상을 말뚝에 매어 놓고 12m 앞에서 고사총으로 산산조각을 내버렸다는 정보도 입수했다고 합니다. 김정일은 생전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하면서 '절대 피붙이는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복형 김정남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극물로 암살한 것(2017년 2월)도 지적했습니다. 테러분자를 도주시켜 완전 범죄를 저지르려는 것을 당시 국정원에서 막았다고 하더군요."

엄상익 변호사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북에선 처단 대상, 남에선 대통령에게 뇌물 준 범죄자 됐다”고 말했다.이미지 크게보기
엄상익 변호사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북에선 처단 대상, 남에선 대통령에게 뇌물 준 범죄자 됐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현 정권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한 비핵화나 평화 체제를 이끄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겠군요?

"그의 말로는 '노동당 규약에 나와 있듯이 북한의 최종 목표는 남조선 혁명이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혁명이 성공하면 그 순간부터 고생이 끝난다고 세뇌해왔는데 평화 공존이라면 북한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북한에서 김씨 일가는 신(神)의 위치에 있고 주민은 광신도 집단처럼 됐다는 겁니다. 김씨를 물러나게 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평화 공존 협정은 불가능하다고 했지요."

―정권 교체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을 높일 수 있지요. 어쨌든 이병호 전 원장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어떤 대북 공작을 했나요?

"많은 작전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태영호 공사 등 많은 북한 엘리트가 우리 쪽으로 왔습니다. 북한 안에서는 김정은 독재에 반발하는 기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국정원이 그런 자생적 저항 집단에 돈을 대고 여건을 마련해줬다고 하더군요. 그게 거의 다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박근혜 정권의 운명이 먼저 끝났다고도 했습니다."

―그것이라면 '김정은 제거'를 말합니까?

"그런 제거 시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그가 테러리스트로 북한 정권에 찍히게 됐습니다. 김정은이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죽이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정말 그렇게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까?

"2017년 5월 조선중앙방송 등이 '우리의 최고 수뇌부를 해칠 흉계를 꾸민 국가 테러 범죄자들을 극형에 처한다는 것을 엄숙히 선포한다'는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 중앙검찰소의 연합 성명을 보도했지요. 그 테러 범죄자로 이병호 전 원장 등이 지목됐습니다."

―이번 책에서 이병호 전 원장에 대해 '북에서는 죽여야 할 남측의 테러리스트, 남에서는 대통령에게 뇌물을 상납한 파렴치범이 된 상황'이라고 썼더군요.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전달한 게 '적폐 청산 대상'이 됐지요?

"역대 대통령들도 정보기관의 특활비를 쌈짓돈처럼 써온 게 사실입니다. 저는 노태우 정부 때 안기부에 특채돼 차장 특보실에서 잠시 근무한 적 있습니다. 지금의 서훈 국정원장은 부장 특보실에서 근무했고요. 그 시절 특활비 일부를 맡아보면서 국민 세금을 이렇게 써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상급자는 '장부나 사용 근거를 남기지 말라. 모든 걸 기억으로만 남겼다가 나갈 때 모두 잊어버리라'고 주의를 주더군요."

―그런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군요. 대통령들은 국정원 특활비를 자신의 통치 자금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제도와 관행이 그랬기에 사법적 처벌을 하는 건 문제 있다고 봅니까?

"현 정권이 이를 적폐로 삼은 것은 총론적으로는 옳다고 봅니다. 국민의 세금은 그 용도에서 엄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법부가 이를 처벌하려면 정확한 법리(法理)로 해야 합니다. '죄형법정주의'이니까요."

―검찰은 국고손실죄와 뇌물죄로 기소했지요?

"1심 법정에서 '뇌물죄'는 인정이 안 됐고 '국고손실죄'만 인정됐습니다. 제가 항소심 변호를 맡아 국고손실죄 법리를 따졌습니다. 국고손실죄는 회계 관계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국정원장은 회계 책임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국고 손실이 되려면 청와대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부터 밝혀져야 하는 겁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답해야 하는 겁니다."

재작년말 검찰에 출두하던 이병호 전 원장. /박상훈 기자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국정원 특활비로 옷값 등을 지불했다고 주장했지요?

"검찰 조서에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현찰을 줘 의상비 지급을 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그 현금이 대통령 봉급을 인출한 건지 국정원 특활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검찰은 '국정원에서 올라온 현찰을 대통령의 서재에 가져다 놓곤 했다'는 '문고리 3인방'인 이재만 총무비서관의 진술을 그 증거인 것처럼 법정에 제출했습니다."

―법정에서 '문고리 3인방'의 참고인 신문을 통해 확인하지 않았나요?

"물론 했지요. 하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비서관은 겁을 먹은 듯 제대로 말을 못 했습니다. 나머지 비서관 두 명도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문고리 비서관들의 수준이 이 정도였는지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국정원 특활비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 3명과 비서실장 1명이 구속 기소돼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박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하진 않았습니까?

"박 전 대통령이 법정에서 '국고를 손실하지 않았다. 국정원장들이 보낸 돈은 뇌물이 아니다. 모두 내 책임이다'라고 한마디만 해주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국정원 특활비 재판에서 핵심 증인은 박 전 대통령인데, 누구도 그를 증인으로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뒤늦게 항소심에서 증인 신청을 하자, 재판장이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휴정(休廷) 시간에 피고인 비서실장이 '어떻게 지존(至尊)을 증인으로 신청하나'라고 제게 따졌습니다."

―작년 10월 옥중의 박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 특활비 재판에 증언해달라고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군요.

"일주일에 1000통씩 편지가 들어간다는데 제 편지를 안 볼 확률도 있겠지만, 면회도 거부하니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그의 편지는 '먼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좁은 감옥 안에서 우는 마음, 허탈에 빠진 마음, 어둠에 잠긴 마음일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그 마음에 빛이 비치기를 기도합니다'로 시작됐다.

〈검찰 측은 박근혜 님의 진술서 한 장을 달랑 법정에 내놓았습니다. '비서관이 괜찮다고 해서 그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진술서를 보면서 대통령이라는 분이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박근혜 님이 국정원 돈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디에다 어떻게 썼느냐입니다. 그 한마디에 국정원장들과 청와대 비서실장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박근혜 님 본인에 대한 재판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충성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병호 전 국정원장에 대한 재판은 별개라는 생각입니다. 박근혜 님은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 침묵이나 증언 거부는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2018년 10월 19일 오후 2시 증인 신문에 꼭 나와주실 것을 정중하게 말씀드립니다.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저는 변호사로서 내가 맡은 한 노인의 누명을 벗겨줄 소명이 있고,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안보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던 박근혜 님은 자신의 부하를 지켜줄 의무가 있습니다….〉

답장은 증인 신문 이틀 전에 재판부 앞으로 도착했다. 진술서 형식으로 '국정원 특활비를 지원받게 된 경위, 국정원 예산의 개인적 유용에 대해, 이병호 원장 등에 대한 선처 호소'로 되어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고손실죄'를 파기하고 '업무상 횡령죄'로 고쳐 "특활비를 본래의 목적에 사용 안 하고 청와대에 지급한 것은 횡령에 해당되며 이병호를 징역 2년 6월 및 자격정지 2년에 각 처한다"고 판결했다.

"이제 문재인 청와대도 더 이상 국정원 특활비를 쓸 수 없을 겁니다. 세금을 내는 국민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결과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 3명과 비서실장은 어떤 의미에서 제도 개선의 희생양이 된 셈입니다."

얼마 전 이병호 전 원장은 구속 기간 만료로 석방됐다. 우리 나이로 팔십이었다.



조선일보 A30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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