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 판결 '지하철 성추행'도 국민청원... 여론재판에 법치가 흔들

백윤미 기자
입력 2019.05.28 17:20 수정 2019.05.28 17:27
1·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지하철 성추행’ 사건 피의자의 형이 지난 2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무죄 주장 증거 영상. /유튜브 캡처
이른바 ‘지하철 성추행’ 사건 피고인 김모(47)씨의 형은 지난 2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내 동생은 성추행범이 아니다"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청원을 올렸다. 논란이 커지면서 이 사건은 '제 2의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 되는 모양새다.

사건은 지난해 5월 24일 일어났다. 김씨는 이날 오전 8시 49분쯤 경기 부천시 역곡동에 있는 지하철 1호선 역곡역에서 구로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앞에 서 있던 여성 A씨에게 바짝 붙어 오른쪽 팔뚝으로 A씨의 팔뚝을 비비고, 왼손으로 A씨의 오른쪽 어깨 부위를 비비는 등 약 8분 동안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은 1·2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이 났다. 김씨는 1심에서 징역 6개월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 3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판결도 1심과 같았다. 법원에 따르면 피고인 본인도 1심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앞서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됐던 이른바 '곰탕집' 사건도 1·2심 모두 유죄가 인정된 사건이었다. 두 사건 모두 대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김씨 형이 올린 청원 글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논란이 됐고, 언론을 통해 삽시간에 확산됐다. 그러자 법원은 이례적으로 지난 27일 1·2심 판결문을 공개했다. 그런데도 논란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재판 불신' 여론이 커지고 있다. 이 글은 올린 지 이틀만에 6만5000명이 동의를 눌렀다.
◇법조계 "청원 통한 여론전 재판에 영향 못줘"...청와대도 난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의 2차 여론전 무대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판을 앞두고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국민청원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경우 청와대는 난감하다. 원칙적으로 사법부 판단인 재판 결과에 대해 청와대가 별도의 의견을 낼 수도, 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곰탕집 성추행 사건’ 무죄를 주장한 청원이 동의 20만명 넘겼을 때 정혜승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삼권분립의 원칙상 사법부나 입법부 관련 사안은 청와대가 답변하기 어렵다"며 "앞으로 국민들이 청원하실 때도 이 부분을 감안해주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국민청원이 사법 불신 분위기만 조장할 뿐 실제 재판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서울중앙지법 한 부장판사는 "법원이 적법한 시스템과 절차, 증거에 따라 판결을 한 것인데도 불복해 청원을 올린 것은 다수가 동의를 누른 사실로 위로받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재판 외에 그런 식으로 여론전을 하는 것은 판사에게 지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법률사무소 월인 채다은 변호사는 "피의자 측은 청원을 올려 기사화가 되고, 여론을 움직이면 판사도 그에 반하는 결과를 내기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유무죄 판단은 기본적으로 증거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청원이 진술을 뒤집을만한 여파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국민청원 사연을 일일이 보도하는 언론도 이같은 상황을 부추기는 데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아무리 청원에 사법부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해도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으면 논란이 확산되지는 않을텐데, 있는 그대로 퍼나르듯 보도하다보니 국민들은 사법적 절차를 여론으로 뒤집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자유한국당을 해산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 183만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정당 해산·판사 파면…무리한 요구, 사회적 갈등과 혼란 불러"
국민청원 내용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도 문제다. 현재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청와대의 권한 밖이거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청원, 장난성 청원 등이 무분별하게 올라온다. '동의자 수 20만건 이상' 이면 청와대 공식 답변을 들을 수 있다는 조건만 있을 뿐이다.

지난 4월 말 올라온 "자유한국당을 해산해 달라"는 청원이 대표적이다. 이 청원에는 무려 183만1900명이 동의했다.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더불어민주당을 해산해 달라"고 맞불을 놨다. 이 청원에도 33만5614명이나 동의했다.

재판 결과를 두고 판사를 처벌해 달라는 청원도 올라온다. 올 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에서 일부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재판장을 파면하라는 글에는 26만명이 동의했다. 당시 청와대는 이 청원과 답변 내용을 법원행정처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사법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논란을 불렀다.

성별간 대립과 혐오를 부추기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이수역의 한 술집에서 일어난 남녀간 폭행 사건인 이른바 ‘이수역 폭행 사건'은 양측 모두 상대방이 "성 혐오 발언에 폭행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의 본질과 다른 성별 갈등 양상으로 번졌다. 지난해 8월에는 ‘여성도 군 복무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청원이 등장했다. 정부 차원에서 여성들의 군입대 계획을 마련하라는 주장에 12만3000여명이 동의했다.

이밖에도 ‘5.18 광주 학살의 원흉인 전두환 일당을 국제형법상 반인도 범죄로 소추하기 위한 국제특별형사재판소 설치를 추진하자' ‘남성들의 성기를 없애달라' ‘월요병이 심각하니 전국 학교와 회사를 철거해 달라' ‘연예인 수지를 사형해달라'는 등 비현실적인 요구들도 넘쳐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청원 내용을 대통령 권한사항으로 한정하는 등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나 사법 등 고유의 영역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들은 청원을 금지하는 등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며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 자체가 포퓰리즘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원장 출신 한 변호사는 "지금 방식으로는 국민들이 실생활에 도움을 주기 보다는 감정적 배설 창구 역할만 할 뿐이어서 사회적 혼란과 갈등, 사법 불신, 정치적 악용 등 부작용이 더 커 보인다"고 했다.

지난 20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문준영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 위원이 '장자연 사건' 관련 최종 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국민 뜻’ 강조하니 ‘인민재판' '여론재판' 우려 나오는 것"
헌법학자들은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기 위해선 사법부의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는 대통령 등 국가 기관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여론과 국민으로부터의 독립도 매우 중요하다"며 "법에서는 소수자의 인권보호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다수의 논리만을 강조하다 보면 ‘여론재판' ‘인민재판'이 돼버릴 것"이라고 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반복되고 있는 과거 사건들의 재조사나 재심 등도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차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라며 "검경 개혁에 수사기관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는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요소인데, 오히려 이런 지시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어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했다.

차 교수는 이어 "수사기관의 결탁이나 부실한 수사로 재수사가 이뤄져야 할 사건도 분명 있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며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인 것들에 대한 수사를 강조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이미 결론난 사건도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고 했다.

한국형사소송법학회 수석 부회장인 정웅석 서경대 교수는 "정부에서 워낙 ‘국민의 뜻’을 강조하니까 다수의 원리가 조명받는 것"이라며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이를 보완하는 것이 법치주의인데 지금은 민주주의의 과잉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또 "(이런 논리대로라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청와대가 최후적 호소 기관이 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했다.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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