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0] 일본에서 꽃핀 조선 도자기의 비결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입력 2019.05.24 03:12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경남 사천(泗川) 출신의 김존해(金尊楷)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건너)간 도공이다. 규슈의 유력 다이묘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에게 스카우트된 존해는 부젠(豊前·후쿠오카현)에 자리를 잡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한다. 존해가 가마터를 잡은 곳의 지명을 딴 '아가노야키(上野燒)'는 지금도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명성이 드높다.

호소카와는 '리큐칠철(利休七哲·센노 리큐에게서 다도를 익힌 수제자 7명)'의 한 명으로 불리던 다도 명인이었다. 존해가 빚어내는 질소(質素)한 도자기에 흠뻑 빠진 호소카와는 히고(肥後·구마모토현)로 영지를 옮길 때에도 존해를 가신단으로 동반할 정도로 그의 기예(技藝)를 아꼈다.

존해는 특이하게 일본에 두 번 간 사람이다. 기록에 의하면 1592년 일본에 잡혀갔지만, 청자 기술 습득을 위해 조선에 돌아왔다가 정유재란 막바지인 1598년 일가 친척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존해가 왜 다시 일본으로 갔는지 그 속사정까지 기록에 남은 것은 없다. 다만 1622년 호구 조사가 의미심장하다. 존해의 도요(陶窯)에는 주민 65명, 야키모노시(도공) 8명, 우리코(판매원) 10명, 말 7두, 소 1두가 기록되어 있다. 웬만한 무가(武家) 부럽지 않은 인원과 재산이 존해의 관장하에 있었다.

내막이야 무엇이건 존해는 일본 땅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신명을 바쳐 도자기를 구우며 천수를 누렸다. 존해를 총애한 다다오키의 직계손이 그 자신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이다.

조선의 도공들이 활약한 일본에서는 찬란한 도자기 문화가 꽃을 피웠지만, 정작 원천 기술국 조선의 도자기는 시름시름 쇠퇴의 길을 걸었다. 현장에서 실용적 기술로 실리를 창출하는 전문가를 '쇼쿠닌(職人)'으로 대우하며 합당한 보상과 영예를 부여한 일본의 풍토가 그 갈림길의 배경에 있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전하는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조선일보 A34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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