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간 존엄에 대한 의문… 칸트에서 해답을"

김성현 기자
입력 2019.05.16 03:01 수정 2019.05.16 05:02

백종현 교수
'한국 칸트 사전' 낸 철학계 원로… 지난해 칸트 번역 논쟁의 주역

한국칸트학회 고문인 백종현(69)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백 교수는 2002년부터 '한국어 칸트 전집'(아카넷)을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학회 소속의 철학자 34명이 지난해 또 다른 '칸트 전집'(한길사)을 펴내면서 백 교수의 번역에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프리오리(a priori)'를 백 교수는 '선험적(先驗的)'이라고 옮겼다. 하지만 한길사판 번역자들은 '아프리오리'로 표기했다. 반면 백 교수가 '초월적'으로 번역한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을 한길사판은 '선험적'으로 옮겼다. 백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 칸트 사전'에서 자신의 번역어를 고수하면서 칸트 논쟁 '제2라운드'를 예고했다.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가 쓰고 옮긴 한국어 칸트 전집과 철학 서적을 쌓으니 산을 이뤘다. 그는 “매일 원고지 10장은 써야 편하게 잠든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칸트 번역을 놓고 왜 의견이 나뉘는가.

"버스나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외래어는 듣는 순간 일정한 형상을 떠올릴 수 있지만 철학적 개념은 눈에 보이는 물체가 없으니 다의적이고 모호하다. 1990년 한국칸트학회 설립 이후 오랜 토론과 학술 회의를 거쳤으나 번역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이유도 있다."

―이번 책에 '칸트 저작을 번역할 때 개념어는 남김없이 한국어로 옮겨야 한다'고 썼다.

"최근 현대 철학을 전파하는 이들이 외국어 용어를 발음대로 표기해서 유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독일어 '레히트(Recht)'도 '법'이나 '권리'가 아니라 '레히트'로 표기할 것인가. '쿤스트(Kunst)'도 '기술'이나 '예술' 대신 '쿤스트'로 쓸 것인가. 철학적 탐구에서는 독단(獨斷)이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거나 다수의 합의를 앞세워 자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는 다수결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칸트 철학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광복 50주년이었던 1995년 서양 철학 관련 논저 7200여 건을 철학자별로 분류하니 1위가 칸트였다. 석박사 논문도 칸트가 1위다. 우선 칸트의 인간 주체성, 만민 평등, 국제 평화 사상에 대해 한국인들이 친화성을 느낀다. 칸트 철학이 강조하는 자유와 평등이 좌우 어느 쪽에서도 수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인식됐던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칸트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얘기한다(웃음)."

―칸트가 대표 철학자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리스·로마 철학과 근대 과학, 기독교라는 서양 문화의 원류가 뒤섞인 드넓은 바다와 같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이 칸트에 모여들었고, 칸트 이후 모든 사상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는 말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번역할 때 '기미 독립 선언서'를 부록에 실었다.

"정치적 주권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에는 칸트의 철학 중에서도 도덕 이론과 영구 평화론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대표적이다. 국제 평화의 기반 위에서만 인류의 지속적 번영을 기할 수 있다는 칸트의 사상은 1차 대전 후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100주년인 기미독립선언서 역시 칸트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이번 칸트 사전은 '가능성'이란 용어에서 시작해 '희망'으로 끝난다.

"인간은 가능성과 희망 사이에 있는 존재 아닐까. 그렇기에 교육과 의무가 중요한 것이고. 이번 사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단어도 교육과 의무다."

―21세기에도 칸트 철학은 유효한가.

"인공지능(AI)의 시대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커진다. 하지만 인격은 지능지수(IQ)와 동의어가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성도 지혜와 도덕, 미감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칸트는 경탄과 외경을 일으키는 두 가지로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을 꼽았다. 인간성이 위기에 처한 지금, 인간 존엄성을 강조했던 칸트 철학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다."



조선일보 A25면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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