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18년간 나는 홈리스... 세상은 거칠지만 따뜻했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04.20 07:00 수정 2019.04.21 10:03
18년 홈리스 ‘빅이슈' 판매원, ‘논픽션' 작가 되다
"거리에서 받은 선의 잊지 않아, 염치 지키며 살려했다"
"삶은 뿌린대로 거두는 것… 조각가 꿈 놓지 않으려"

노숙인 자립 잡지 ‘빅이슈’의 판매원이었던 임상철(52세)과 그의 동거묘 냐옹 씨. 그는 IMF이후 18년을 홈리스로 지냈다./사진=남강호 기자
빅이슈는 영국에서 시작된 노숙자 자활잡지다. 한 권을 팔면 홈리스의 몫으로 절반의 금액이 떨어진다. 약간의 보증금을 모으면 임대주택을 빌려준다. 빅이슈를 판매하는 사람을 일명 ‘빅판’이라고 부른다. 지하철역에서 간간이 ‘빅이슈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 그 말은 "저는 노숙자입니다"라는 외침과 유사했다.

임상철(52세)은 얼마 전까지 홍대 입구 3번 출구에서 빨간 조끼를 입고 6년간 빅이슈를 팔았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사람들이 이 일을 해요. 쪽방에서 자고 냄새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우리를 피해요. 100% 동정심으로 책을 사지요. 잡지가 다 팔려서 모자란다 싶으면 쓰레기통을 뒤지곤 했어요. 거기에 버려진 빅이슈가 가득했어요. 잡지를 매개로 구걸을 하는 거죠. 자존감이 너덜너덜해지지만, 신경을 꺼야 했어요."

돈 있는 자도 돈 없는 자도 그들을 위로할 더 낮은 자들을 원했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잡지를 사며 ‘나는 저런 식으로 살지 말아야지'하는 사람도 봤어요." ‘빅판'일 때 임상철은 잡지를 잘 못 파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보다 낮아 보이는, 가여운 사람들의 것을 사요." 사회의 밑바닥에 있었으나 동정받는 것을 꺼렸던 그는, 어느 날 잡지에 직접 쓰고 그린 이야기와 그림을 담은 엽서를 끼워 팔았다.

그것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구구절절한 지하철 노인의 편지가 아닌, 한 자존감 있는 남자의 힘 있는 인생 에세이였다.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고 무정하리만치 덤덤한 ‘홈리스의 편지'를 읽은 한 편집자가 출판을 제안했고, 52통의 거리의 편지는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정도의 삶'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내고 미술 조형물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IMF 이후 서울역으로 가서 홈리스가 되었다. 18년의 노숙 생활을 기록한 책에서 느껴지는 건 필사적으로 삶을 놓지않는 ‘생에의 애착'이다. 모든 노숙인들이 다 그와 같지는 않겠지만, 임상철은 불행 앞에서 징징대지 않는다. 무정한 이 도시에서 그가 채굴해낸 이야기는 빈자의 비굴이 아니라 이웃의 소소한 친절과 그에 반응하는 스스로의 빛나는 염치였으니.

혹한의 겨울은 ‘건기를 맞은 아프리카 동물들이 굶주리듯 하루살이 잡부 인생이 치뤄야할 댓가’이며, 그런 ‘절망의 겨울’을 맞아도 ‘시간을 버려야 내가 산다'는 그의 읖조림은 거리에서 분투한 터프한 자연주의자의 독백으로 읽힌다. ‘재수 없는 노숙자'라고 손가락질과 폭행을 당해도, 때로는 받은 일당으로 편의점에서 컵라면 소주 파티를 열며 "김씨, 이씨, 박씨 모두 내일 봅시다" 기약 없는 명랑한 인사를 한다.

궁지에 몰렸어도 기어이 빌려 간 돈 25만원을 갚고 벤치에서 객사한 친구처럼, 그 또한 공짜 밥 먹기를 싫어했고, 교회 옆 버려진 소파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밤을 지새웠다. 잠시나마 고시원 한 칸 잠자리에 곁을 내어주던 선배, PC방에서 라면값을 내주던 동료, 쉼터에서 손빨래를 해주던 타인… 때로는 염치없는 자들의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 도시에서 그들이 질서와 경우를 지키며 살아가려는 모습은 몹시 경이롭다.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의 작가 임상철을 만났다. 그는 얼마 전부터 임대주택에 입주, 평생 꿈이던 조각 작업도 조심스레 병행하고 있다. 2016년엔 가톨릭 청년회관에서 전시회를 했고, 장애인 미술 협회 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임씨, 정신 차려. 당신은 홈리스라고!” 그는 스스로를 다그치곤 했다./사진=남강호 기자
강서구 초록마을 언덕의 낡은 빌라에 들어서기 전 편의점에서 전화를 했다.
"필요한 물건 없으세요? 커피 사갈까요?" "허허. 그냥 오세요. 제가 캔 커피 두 개 사놨어요."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전직 홈리스와 격의 없이 캔커피를 나눠 마셨다. 돈이 없어도 종이 신문은 꼭 사서 본다고 했다. 책꽂이엔 서양미술 거장들의 책, 이상문학상 시리즈,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눈에 띄었다. 전기밥통과 고양이 사료가 나란히 놓인 방 안을 그의 빈려묘 ‘냐옹 씨'가 어슬렁 거리며 지나다녔다.

-요즘은 하루를 어떻게 보냅니까?

"구청에 신청한 자활 근로가 시작되는 날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빅이슈 판매는 얼마 전 그만뒀습니다. 책을 내고는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림을 그리거나 조형물을 만들면서 보내요."

-밤에 잘 때는 주로 무슨 생각을 하나요?

"생존을 생각하고 예술을 생각해요. 작품이 좀 팔리면 좋겠어요. ‘굶어죽어도 예술’이라고도 하지만, 굶주림은 예술이 아니예요(웃음). 몇 년 전 겨울, 안성탕면 1개로 8일을 버틴 적이 있어요. 겨울이면 인력사무소 일이 끊겨 고시원에 온종일 누워만 있었어요. 24시간 텔레비전 소리는 귓가에 아득하고 4일 후부터 허기도 못 느끼고 정신만 몽롱해집디다(웃음)."

갑자기 홈리스로 전락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사업실패나 이혼 후 가족과 인연이 끊기면서 서서히 거리의 생활에 젖어들게 된다고.

-홈리스로 살 때 자신을 하루살이, 들개, 민달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말이 가장 나답다고 느꼈나요?

"들개죠. 나는 나를 들개라고 느꼈어요. 민달팽이일 때도 있었죠. 들개일 때는 강하고 거칠고 야성적이었고, 민달팽이일 때는 나약하고 부서질 것 같은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빅이슈를 판매할 때도 들개 스타일은 잘 못팔아요. 민달팽이들이 잘 팔죠. 나는 내내 잘 못팔았어요. 길거리에서 살지만 ‘나는 예술가'라는 반항심, 자의식 같은 게 있었던 가봐요."

임상철은 제주도에서 삼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6살에 돌에 맞아 한쪽 눈이 실명했고, 8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여관방에 놓고 떠났다. 그와 형은 보육원에서 자랐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형물 제작업체에서 일했다. IMF 한파가 있던 1998년 노숙자가 되어 2016년까지 거리에서 살았다.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정도의 삶'은 ‘노숙인의 삶'의 궤적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1인칭 논픽션으로서도 문학적으로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18년 노숙은 제법 긴 세월인데요.

"저는, 저를 가난한 노동자 정도로 생각했어요. 노숙자 시설에서 양말 갈아신으라는 말을 듣고서야, 체감했죠. 아! 내가 냄새나는 노숙자구나. 배낭에 작업복 넣고 다니는 노가다 일당 잡부 임 씨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노숙자였던 거죠. 혼자서만 예술가라고 설레발을 치는. 허허."

-궁핍하게 살면서도 항상 정중하게 염치와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빅이슈를 팔 때 그걸 사주는 사람이 대개 젊은 여성들이었어요. 동정심에 그랬겠지만 고마웠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성 노숙자 쉼터에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를 해요. 어릴 적 보육원에 있던 경험이 있어서 고아원에도 기부를 하고요. 잡지 두 권 정도 금액이에요. 그렇게라도 염치를 지키려고 해요."

-이젠 들개도 민달팽이도 아닙니다. 안정된 주거가 있는 지금은 자신을 뭐라고 부릅니까?

"과거엔 하루살이였고요. 지금은 좀 진화된 생존주의자입니다(웃음). 지금도 공공근로를 기다리며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요. 임대 주택도 관리비를 못 내면 쫓겨나거든요. 한정된 자원을 두고 사람들은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로 나뉘지만, 저는 그냥 자연주의자입니다. 한때는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고요(웃음)"

책이 한 5만 권쯤은 팔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인세는 그동안 빅이슈 잡지에 끼워 팔기 위해 들었던 복사 비용과 거의 ‘똔똔'이었다. 문방구에 저금한 돈 찾은 정도라고 풍선에 바람빠지듯 피식 웃었다./사진=남강호 기자
-노숙자들에겐 편의점과 피시방이 이 도시의 고마운 쉼터더군요.

"테이블이 바깥에 옹기종기 늘어서 있으니 3~4시간 간단히 먹고 쉬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어요. 허름한 사람이 허기를 채우기에 좋지요. 편의점이 없었으면 공원이나 야산으로 떠돌았겠죠. 피시방도 설비가 좋고 깨끗한 곳은 안돼요(웃음). 한눈에 주인이 우리같은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나 파악해야죠. 느낌이 맞아야 해요. 허허. 여자분들은 주로 찜질방에 머물러요. 표시가 안날 뿐 다들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어요."

-가장 상처가 될 때는 언제였나요?

"나름 단벌 외출복을 입고다니는데, 잘 씻질 못하니 냄새가 나요. 사람들이 피할 때 ‘어 왜 이러지?’ 싶어요. 그런 불일치 자체가 상처죠."

18년간 안전화를 신고 다녔으나, 그 발걸음은 한번도 안전한 곳을 디디지 못했다. 경멸과 외면은 익숙해지려고 해도 소름돋은 제 살갗처럼 매번 소스러쳤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마음은 정과 망치가 되어 스스로를 ‘홈리스'라는 섬세한 조형물로 세공해갔다. ‘미켈란젤로도 장화를 벗지 않아 고랑내가 진동했다잖아. 가우디도 길가다 마차에 치어죽었을 때 사람들이 행려병자인 줄 알았대. 나는 날 것 그대로의 가난한 예술가로 세상을 여행 중인 거야.’ 뭉크의 ‘절규'에 자신의 몸을 겹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립이라는 단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좋아하지 않아요."

-어째서지요?

"자립은 스스로 일어선다는 말이잖아요. 저는 원래부터 일어선 사람이었어요. 내 시간을 스스로 쓰는 게 자립인데, 그런 면에선 구걸하는 사람도 나름대로 자립하고 있는 거죠. 그것도 그 사람만의 노동이거든요. 먹고 살려는 본능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어린아이가 공부하는 것도 자립이죠. 저는 살아가는 시간 자체가 자립의 몸부림이라고 보는 겁니다. 죽기 전까지 시간은 다 공평해요. 단지 번듯한 일이 있고 없고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으면 해요."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는, 누구나 ‘일어서서 걷는' 자립의 시간을 사는 거라는 말이 명치를 때렸다.

임상철의 작품. 그림에 대한 촉이 좋다는 평을 어린 시절부터 들었다. 보육원 시절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는 그의 몫이었다.
-살면서 불시에 많은 사람의 죽음을 접하셨더군요. 주변의 노숙인 친구들의 죽음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같이 빅이슈를 판매하던 사람들도 벌써 4명이나 죽었어요. 나는 미술에 대한 꿈으로 버티지만, 많은 분이 술로 지새우다 돌아가시죠. 그분들은 돈보다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죽어요. 빅이슈 잡지를 파는 것도 절반 이상은 순간의 교류를 원해서예요. 잡지 책 건네면서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그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좋은 거예요. 그만큼 쓸모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거예요."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고 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작업다운 작업을 못해보고 죽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뿐이라고. 책에서 그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언급했다. 주인공 파이가 죽을 뻔한 순간에 ‘신이여, 지금까지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놀랐다고. 그도 신에게 기도를 할 때가 있다. 혹한의 겨울에 한뎃잠을 잘 때. ‘신이시여, 저는 하루살이입니다. 내일 아침 제발 일 나가게만 해주세요.'

-신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겨울의 밤은 영하 17도까지 떨어져요. 다음날 다행히 인력사무소에서 일거리가 생기면 몇 십 킬로그램 벽돌을 져도 힘든 줄을 몰라요. 저녁에 안도할 수 있다는 그거 하나로 견뎌요. 사우나 가서 내 돈으로 밥도 사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어떤 신이 들어줬는지는 모르겠어요. 예수, 부처, 알라 중 한분이겠지요(웃음)."

뚜렷한 종교는 없으나 수녀님들의 댓가없는 헌신엔 감사를 표했다. ‘토마스의 집' 등 영등포에 있는 무료급식소는 돈없고 굶주린 노숙인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고.

-내일이 두려운 노숙인들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노동 일하는 노숙인들은 봄이 오기만 기다려요. 겨울은 지긋지긋해요. 봄 여름 가을 벌어서 겨울을 대비하면 된다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요. 하루 벌면 하루 반나절은 먹고살 만해요. 하루 일 끝나고 인력 사무실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가 제일 좋아요. 주머니도 두둑하고. 봄에는 노숙인들 끼리 돈도 빌려주고 밥도 사주죠. 겨울에는 인심이 박해요. 미래는 언감생심이고, 그저 강퍅한 오늘만 있으니까요."

임상철에게 부양의 기쁨을 알려준 고마운 동거묘 냐옹 씨. 어느날 지하철 역에서 1만원을 주고 샀다./사진=남강호 기자
임대 주택이 생긴 후엔 어느 날 지하철 역사에서 파는 고양이 한 마리를 1만원 주고 사 왔다. 홈리스로 지낼 때 지인의 죽은 강아지를 야산에 묻으며 꼭 내 무덤을 파는 것 같았다던 임상철. 생명은 온기뿐 아니라 의외의 기쁨을 안겼다. 어둠 속에서 처음 ‘오도독' 사료 씹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오십 평생 처음으로 남을 먹인다는 부양의 자긍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고양이를 이름 없이 ‘냐옹 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뭐지요?

"주종 관계가 아니라 길 위의 동지니까요. 지금도 한 집에 두 집 살림하듯 독립적으로 살고 있어요. 앞으로도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잖아요. 그때가 되면 "우리 이제 어디로 떠나지? 냐옹 씨!" 하고 묻겠지요."

-고흐 다큐멘터리를 보며 가족들이 지원해주는 걸 보고 부러웠다고요. 가족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혈연의 기억만으로도 애틋한가요?

그에겐 소식이 끊긴 형과 소식만 닿는 여동생이 있다.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가족같이 지내자는 말을 가끔 하는데 과연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가족을 모르고 지냈으니 그립긴 해도 애정은 잘 모르겠어요. 한때 먹고 자고 식구처럼 지내자던 사람들도, 때가 되면 안녕이지요(웃음)."

-아픈 당신에게 그냥 쉬엄쉬엄 있다 일당 받아가라고 한 분이나, 함께 살자고 한 분들… 작은 선의를 베푼 길 위의 개인들이 당신에겐 가족이 아니었을런지요?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너는 나를 평생 원망하며 살아갈 거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지만, 임상철은 자신에게 생명을 준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다고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작은 키에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장사하시던 모습만 기억나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뀌었다면, 제가 좀 평범하게 살았을까요? 모르겠어요."

“절망 속에서도 완전히 끈을 놓지 않았던 건 내 운명이 이렇게 사라지진 않을텐데...라는 희미한 믿음같은 게 있었어요.”/사진=남강호 기자
-평범한 삶을 원했습니까?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모르겠어요. 가족끼리 오손도손 사는 삶도 좋겠지요. 하지만 고독해도 마음껏 시간을 쓰면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페이스북을 보면 화목한 가정을 이끄는 내 나이 또래의 가장들도 다 비슷하게 피곤하더군요. 여럿이 어울려도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있이요. 혼술이 더 낫기도 해요. 어떤 삶이 더 낫다고는 말 못해요."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조각합니까?

"이건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예요. 예수 대신 죽은 난민 소년을 형상화했어요. 이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만든 거예요. 모델이 없어서 마음껏 그리고 조각할 수가 없어요."

-살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한참을 생각하다)없어요. 군데군데서 작은 선의를 받았고 저도 그만큼 돌려줬습니다."

갑자기 생각난 듯 중학교 때 선생님 이야기를 꺼냈다. 미술 숙제로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을 부조로 만들어 갔는데 칭찬도 받고 상도 받았다고. 그때부터 조각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고. 그때가 자기 인생의 가장 밝은 점이었다고.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기보다는 작업가라고 명명했다.

-첫 그림을 팔았을 때, 인정받는 기쁨도 컸겠습니다.

"한 어르신의 얼굴 그려드렸는데, 빅이슈 잡지값 5천원에 그림값 1만 5천원을 셈해서 2만원을 주셨어요. 시간을 뺏은 대가라고 조금 줘서 미안하다 시며. 정말 기뻤어요. 반면 젊은이들은 좀 철이 없어요. 공짜 그림에 사인까지 해달라니… 허허. 그래도 어떤 젊은이는 자기 생일 기념으로 친구들에게 선물하겠다고 빅이슈 28권을 사간 적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방안 곳곳에 놓인 조각들. 그는 문래동에 작업실을 내고 미술품을 만들어 먹고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책에서 ‘저는 지금껏 저의 삶을 사랑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고 놀랐습니다. 여전히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태어났으니까 사랑합니다. 다만 이제 들개가 아닌 집개처럼 살고 싶습니다(웃음)."

-100세 시대라는 말은 당신에게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키나요?

"100살까지 살고 싶지 않아요(웃음). 죽기 3일 전까지 정과 망치를 들고 있었던 미켈란젤로처럼 자기 일을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18년 경력의 홈리스 경험자로 보통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홈리스라는 특정 개념보다 단지 조금 더 없는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도 어떤 기능이 조금 더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요?

"나 스스로를 위대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나는 비록 홈리스지만 예술가다. 단지 운이 없을 뿐이다"라고요. 나한테 분노도 하지만 나를 좀 높여 생각하면 건방지단 소리는 들어도 자존감은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말투는 좀 노가다 식으로 거칠어도, 최소한 예의를 지키며 정중하게 살려고 했어요. 급식소 공짜밥도 잘 안먹고, 받은 건 꼭 셈을 치뤄 돌려주려고 했지요."

-신이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어떤 것을 말하고 싶나요?

"첫째, 문래동에 숙소 겸 작업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달에 150~200만원 정도 벌면서 작업으로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둘째, 내 작업을 좋아해서 사주는 후원자나 친구같은 뮤즈가 있으면 좋겠어요. 셋째, 세계적인 거리의 작가들과 교류하고 싶습니다. 노숙하다 반려견 개를 그려 거리의 화가로 유명해진 존 돌란 같은 친구들… 그 친구는 나보다 고생도 안했더구먼, 하하."

20년 노숙 경력을 가진 영국의 아티스트 존 돌란도 거리에서 반려견 조지를 그리면서 유명해졌다. ‘내 인생을 바꿔준 개'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성공한 아티스트가 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임상철은 고생으로 치면 내가 한 수 위이니, 존 돌란과는 소주 한잔 기울이며 그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노숙인이라면 쉼터에 머물며 자립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고 그는 조언한다./사진=남강호 기자
-마지막으로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정도의 삶’을 사는 우리 시대의 소시민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18년 홈리스 생활을 자랑이라 할 수 없어요. 제가 게을렀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반성도 합니다. 살아보니 삶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면 그만큼 풍부하게 주고, 게으르게 살면 빈약하게 주지요. 나이 들어서도 ‘내가 열심히 살았구나' 자부할 수 있다면, 그게 참 인생이고 진리인 거죠. 살아보니 자유로운 사람도 열심히 살 수 있더라고요(웃음)."

우리 생이 계속 이어지는 긴 문장이라면, 어떤 불행이 쳐들어와도 기어이 주어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침착한 의지가 임상철의 생을 밧줄처럼 묶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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