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왜 우리 기름이 우리 선박 통해 北에 밀반출되는가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입력 2019.04.15 03:17

여수·부산·광양에 불법 밀수선박 제 집처럼 드나들고
한국 국적 선박까지 동원돼 한국산 정제유 北으로 밀반출
우리 기업·금융 제재 대상 되면 한국 경제 치명타 입을 것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은 결렬되었지만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는 회담 내내 낡은 영변 시설과 사실상 전면 제재 해제를 맞바꾸고자 했다. 미국의 체제 위협 탓에 핵을 개발한다던 북한은 미국이 준비한 한국전쟁 종료, 수교, 위협 제거, 경제 협력 등 체제 보장 틀에는 전혀 관심 없이 제재 해제만 주장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포괄적 비핵화 합의는 가능한지 물었고, 김정은은 부정적이었다. 트럼프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김정은에게 비핵화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으니 준비가 되면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즉 3차 정상회담을 하려면 비핵화의 전략적 결단을 내리고 이것을 보여 줄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미국에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다는 배달 사고를 냈던 한국이 미·북 대화의 촉진자를 자임하며 굿 이너프 딜, 얼리 하비스트(조기 수확)란 감성적 용어를 앞세워 사실상 제재 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일의 순서를 본다면 당연히 북한에 비핵화의 전략적 결단을 촉구하고 재확인하는 일을 우선해야 했다. 예상대로 한·미 정상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김정은마저 우리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를 말라고 했다.

제재 완화가 무엇이길래 남북한 모두 매달리는 것인지? 하노이 회담의 최대 성과는 대북 제재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2017년 말 수소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계기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량 살상 무기 활동에 국한되었던 대북 제재에서 북한 경제에 직접 영향을 주는 강력한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석탄 등 10억달러에 달하는 광물 수출이 차단되었고, 북한 교역은 90% 가까이 축소되었다. 외화 벌이의 주요 수단인 해외 인력 송출도 크게 축소되었다. 더욱이 유엔 안보리는 북한이 수입할 수 있는 원유를 400만배럴로 그리고 정제유는 50만배럴로 제한했다. 북한 경제가 필요로 하는 정제유를 매년 500만배럴로 본다면 소요량의 90%가 차단되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이 제재 해제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은 국제 제재 틀을 와해하기 위해 외교력을 집중하는 한편 가용 선박을 총동원하여 불법 환적을 통해 필요한 외화와 원유를 확보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국제사회도 총력을 기울인다. 한반도 주변 해역에는 미국·일본뿐만 아니라 영국·프랑스·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다국적 해군력이 전개되어 해상에서 북한의 불법 밀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불철주야 감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차단해야 할 주역인 한국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제재의 구멍이 아닌가 국제사회가 의심하고 있다. 작년 여름 수십만t의 북한 석탄이 남한에 밀반입되었다. 잘못되었다면 우리 국민 기업인 철강 회사, 전력 회사와 최대 시중은행이 제재 대상이 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경고로 그쳤다. 그러나 석탄 밀반입만이 아니었다. 최근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와 미 정부 보고에 의하면 한국산 정제유가 우리 선박들까지 동원되어 상당량 북한으로 밀반출되었다. 한 선박은 27차례에 걸쳐 16만t의 정제유를 공해상에서 불법 환적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영국 해군에 의해 불법 환적이 드러난 싱가포르 국적의 유조선은 한국에서 10만t 이상의 정제유를 밀반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고 있다. 여수·부산·광양에 불법 밀수 선박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놀라운 점은 한국 항만에서 밀수 행위가 이루어지고 심지어 한국 국적 선박까지 동원되고 있었는데 우리가 적발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 당연히 우리 해군과 해경은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가장 큰 감시 자산을 갖고 있다. 특히 해군은 작은 고속 간첩선도 잡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노하우를 갖고 있다. 화물선이나 유조선 같은 큰 배들을 적발하지 못할 리 없다. 우리 정부가 억류 중인 다섯 척의 선박도 우리가 적발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제공한 정보에 의한 것이다. 대북 제재 전문가 조슈아 스탠턴은 이 문제가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문제는 스캔들로 그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기업과 금융기관이 미국에 의해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이 된다면 대외 의존도 100%의 한국엔 치명적이다. 더욱이 하향 국면의 한국 경제가 그와 같은 외부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된다. IMF 쇼크에서 보듯이 우리 경제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제발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에 '몰빵'하다 국민의 삶을 나락에 빠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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