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대통령 혼밥은 위험 신호다"

박돈규 기자
입력 2019.02.02 03:00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DJ정부 첫 비서실장 김중권

서울 용산에서 만난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화해와 조정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요즘 스트레스 지수가 10이라면 정치 활동할 땐 20~30쯤 됐다"며 "당적을 정리하고 물러나 후배들 도우면서 정치를 관전하고 있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중권(8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뜻밖에 홀쭉했다. 신문과 방송으로 기억하는 그 풍채가 아니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발탁한 첫 비서실장인 그는 "정계 은퇴하고 10㎏쯤 빠졌다"며 "스트레스가 없으니까"라고 했다.

프로필만 보면 전반부·후반부가 판이하다. 김 전 실장은 산업화 정권과 민주화 정권에 모두 몸담아 일한 경험이 있다. 경북 울진이 배출한 판사 출신으로 민정당 3선 의원, 노태우 정권 때는 정무수석을 지냈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영남 출신인 그를 비서실장으로 선택했다. 동서 화합의 상징이었다. 새천년민주당 대표 최고위원까지 지내며 '화해와 조정의 달인'으로 불렸다.

"요즘 정치 풍향을 보면서 걱정을 많이 합니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간에 제 몫을 못하고 국민을 불안하게 해요."

지난 29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자택에서 김 전 실장을 만났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가 실종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국민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정당이 존재하는데 제 기능을 못하더라고요. 여당은 여당다워야 하고 야당도 마땅히 할 일이 있잖아요. 정쟁으로만 치닫고 해결하려는 지도자는 보이질 않습니다."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김중권씨는 성공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회자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 초 임종석에서 노영민으로 비서실장을 바꿨다. 무거운 책임과 정치권의 견제가 뒤따르는 자리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여 명인데 두 번째로 오래(21개월) 하셨네요.

"누가 제일 긴가요?"

―문민정부 때 박관용 비서실장(22개월)입니다. 비서실장은 실세형과 관리형으로 나뉘는데 실세셨지요?

"하하하. 비서실장으로서 역할은 충분히 잘 감당했다고 자평합니다. 대통령과의 관계가 누구보다 돈독했고 직언도 많이 했으니까요. 대통령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비서실장과 영부인밖에 없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때 YS(김영삼)도 밖에서는 맨날 청와대를 비판해도 대통령 앞에선 순한 양이 되곤 했지요."

―정치를 보며 걱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만.

"여야(與野) 할 것 없이 무능합니다. '일방통행'으론 답이 없어요."

―손혜원 의원의 목포 투기 의혹으로 연초부터 시끄러웠습니다.

"당돌하더라고요. 아무리 선의로 한 일이라도 기회의 균등, 절차의 정당성이 중요합니다. 손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결정적인 질문은 다 회피하더군요. 궁지에 몰리자 '만일 투기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했지요? 참 가소롭다고 생각했어요."

―야당은 뭐가 문제입니까.

"국민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줘야 하는데 변죽만 울리고 있어요.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비대위 체제라서 그런지 정부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너무 부실해요. 친박·비박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그럴까요? 조해주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임명에 반발해 조를 짜서 릴레이 단식 농성(1개 조당 5시간 30분짜리)을 했는데 한심한 일이에요.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런 악수를 둘 줄은 몰랐어요. 여당이 일방 독주할 땐 국회라는 좋은 마당이 있잖아요. 그곳에서 비판하고 토론하고 견제하며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들이 과연 의회민주주의자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했는데.

"제가 대통령이라면 그렇게 안 해요. 청문회를 존중해야 해요. 국민의 눈높이로 물어보는 절차니까요.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절대 임명하면 안 됩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두려워해야 해요."

―여당은 지금 어떤가요?

"더불어민주당은 정국을 주도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정 관계가 제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가지 않더군요. 의원들이 국민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텐데 왜 모른 척합니까. 소득 주도 성장은 청와대가 정하고 '너희는 따라와' 하는 식이잖아요. 현장에서는 부작용이 많은데 자꾸만 다르게 해석하고 체질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린다며 1~2년 후면 괜찮아진다 하는 게 참…. 원숙한 정치가 필요합니다. 야당의 주장 중엔 경청해야 할 대목이 많아요. 그것도 국민의 목소리니까요. 큰 줄기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있는데 못하더라고요."

―문재인 정부에 어떤 기대를 가졌는지요.

"촛불 정국이었잖아요.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맞는가 안 맞는가를 떠나서 새 정부가 잘되기를 바랐어요. 주변에서 비판하면 좀 더 기다리자고 제가 항변했지요. 근간에는 기대치를 밑돌고 있어 안타깝고 피곤해요."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게 할수록 청와대로 힘이 실리고 국무회의는 '들러리'가 되어버린다"며 "국민은 국무회의에서 더 진지하게 토론하고 정책을 결정하길 바랄 것"이라고 말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대통령의 '혼밥'은 위험신호

DJ는 노태우 정권 때 법사위원장이었던 김중권씨를 눈여겨보았다. 날치기가 만연하던 시절에 충분한 대화와 토의, 표결을 거치는 모습이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DJ가 연락해 나갔더니 "당에 들어와 도와달라"고 했다.

―귀를 의심했겠군요.

"경상도 사람이 새천년민주당 가면 그날로 죽은 목숨이었으니까요. 지역감정이 극심했어요(한나라당이면 영남에서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던 시절이다. 실제로 그는 당적을 바꾼 뒤 총선에서 모두 낙선했다). 그런데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울진 가서 얘기했더니 다들 '김중권이 미쳤다'했지요(웃음)."

―비서실장 제의는 어떻게 받았나요?

"DJ 당선으로 제 소임은 끝났는데 또 만나자는 겁니다. 다짜고짜 '김 의원, 새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고 했어요. 측근이 숱하게 많았는데 저를 선택한 거예요.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죠?

"DJ가 말했습니다. 동서 화합이 중요한데 영남 출신인 당신이 호남 출신 대통령을 도와달라고. 캠프에 청와대를 경험한 사람이 없다며 설득했지요. 국민 화합을 생각한다면 측근이나 자기를 위해 일한 사람 중에서 뽑으면 안 되는 겁니다."

―비서실장은 왜 막중한 자리인가요?

"대통령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알아야 하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분신처럼 움직여야 하니까요. 대통령이 등청하면 비서실장이 보고를 합니다. 대통령은 그렇게 입력된 정보에 대해 나중에 남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좀처럼 믿으려 하질 않아요. 그래서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 회의를 거쳐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해요."

―문 대통령은 혼밥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위험신호라고 봐요.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 발표(대통령 취임 후 식사 회동은 지난 600일 동안 1800끼니 가운데 100회에 그쳤다)에 대해 청와대가 '비공식적인 자리가 많다'고 해명했는데, 통계에 비공식적인 걸 넣어선 절대 안 됩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해요. 여당만 만나는지, 야당도 만나는지, 쓴소리하는 시민단체 대표도 만나는지. 국민이 다 보고 있어요."

―식사도 정치일 텐데요.

"대통령이 자기편만 만나서는 안 됩니다. 비공식으로 했다면 좋은 모습이 아니에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면 전부 공개해야 합니다. 제가 비서실장이라면 '그동안 소홀했는데 앞으로 두루 만나겠습니다'라고 답했을 거예요. DJ 때는 여야 영수를 초청한 회동이 많았는데 그 자리에서 설득하고 타협도 했습니다. 요즘엔 야당은 물론 여당도 잘 안 부르는 것 같아요."

―DJ는 청와대로 전직 대통령들을 10여 차례 초청한 것으로 압니다.

"그랬죠. 문 대통령에게는 불행한 일이에요. 전직 대통령들 대부분이 돌아가시거나 수감돼 있으니. 그래도 정치 원로는 많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겸상하며 정책도 알리고 반대편 생각도 들어야죠."

―취임할 땐 누구나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말하지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수십 번, 수백 번 모이는 게 소통입니까? 입장이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들어보고 설득하고 때론 받아들여야죠. 지금 여당은 과반 의석도 아닌데 소통의 정치가 보이질 않습니다."

"경제 안 풀리면 실패한 것"

문재인 정부가 잘한 것으로는 대북 문제를 꼽았다. 김 전 실장은 "평창 동계올림픽과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다"면서 "문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을 설득해 대북 문제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은 반성도 없고 핵을 포기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가 북한에 딸려 가느냐는 불만도 많다"며 "국민의 마음을 읽으며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999년 3월 김중권 비서실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회의 자료를 설명하는 모습. / 조선일보DB
―이 정부의 적폐 청산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적폐가 있다면 청산해야죠. 그러지 않고 다음을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 같은 얘기예요. 물론 작은 위법을 적폐로 몰면 안 되지요.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선을 지켜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적폐 청산을 빌미로 너무 무자비한 것 같아요. 기간도 너무 길고요."

―서울구치소만으로도 행정부를 꾸릴 수 있다고 비꼬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모르겠네 나는(웃음). DJ는 정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국비 지원을 약속하며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으로 참여했습니다. '피해자인 대통령이 가해자인 대통령을 용서한다면 동서 화합의 징표가 되지 않겠느냐'고 해 큰 감동을 받았지요."

―민심이 떠난 당은 강력해질 수 없을 텐데요.

"저는 야당을 '예비 여당' '잠재적인 여당'으로 정의합니다. 한국당은 비대위 체제를 빨리 청산해야 해요. 강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 나타나야 하는데 눈에 잘 보이지 않아요. 한국당엔 저런 인물밖에 없나 싶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기껏해야 황교안, 오세훈, 홍준표씨잖아요."

―인물이 뚝딱 만들어지진 않지요.

"평소에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능이 망가진 겁니다. 그런 인물에게 당직도 맡기고 국민적 시선을 집중시켜야죠.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엔 청와대 중심으로 끌고 가서 김무성씨가 주관하던 당은 상당히 무력했습니다. 지도자가 배출될 리 없지요. 차제에 정당이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해요. 모두 한마음으로 힘을 합칠 때입니다."

―친박과 비박이 하나가 될 수 있나요?

"그럼 공멸할 겁니까? 초월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고는 살 길이 없어요. 정권 잃은 책임이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녜요. 바른미래당과도 접점을 찾아야죠."

―경제와 민생이 어려운데 문 대통령에게 직언한다면.

"정치를 아무리 잘해도 경제가 안 풀리면 실패한 겁니다.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는데 저소득층 일자리는 오히려 줄지 않았습니까. 경제학 사전에도 없는 소득 주도 성장, 그 부작용이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 경제로는 그걸 수용할 수 없어요. 저소득층과 소상공인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잖아요. 소득 주도 성장을 변경한다고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고집하지 말고 큰 결단을 내려야 해요. 자꾸 늦추면 지지 기반도 허물어질 수 있어요. 해결하지 못하면 총선 결과야 뻔하지요."

―울진 지역구 의원일 때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갈등을 다룬 적이 있지요?

"1992년 총선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원전을 더 짓고 방폐장도 들어온다고 하니 난리가 났어요. 국회의원 집에 화염병과 돌이 날아들었지요. 그때 맞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낙선했고요."

―지금 울진 민심은 어떤가요.

"180도 달라졌지요. 원전이 나갈까 봐 야단입니다. 대안도 없이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는 건 적절치 않아요."

그에게 노영민 비서실장을 향한 조언을 청했다.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려면 노 실장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마지막 공직이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 임했습니다. 비위나 맞추고 다음 기회를 탐내면 그때부터 망가지는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대통령에게 '노(No)'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비서실장과 영부인밖에 없습니다."
조선일보 B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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