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美, 韓 정부 제치고 직접 한국 은행·기업에 대북 사업 경고

입력 2018.11.01 03:19
미 국무부가 남북 협력에서 대북 제재를 준수하는 문제를 조율하기 위한 실무 그룹 설치에 한·미 양국이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말이 '조율'이지 한국 정부의 남북 '과속'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주한 미국 대사관은 지난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 총수가 동행했던 삼성·현대차·SK·LG·포스코 등 한국 대기업들을 최근 직접 접촉해 미국 재무부 의뢰라며 대북 사업 현황을 묻고 전화 회의를 요구했다. 미 재무부는 평양 정상회담 직후엔 한국 은행들에 직접 연락해 대북 제재 준수를 요청했었다. 미국이 한국 정부를 제치고 직접 한국 기업·은행에 대북 사업을 경고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정부가 이 상황을 안이하게 보면 국익에 큰 타격이 올 수 있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 정부에 "남북 관계에 과속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이산가족 면회, 남북 군 통신선 복구 등을 계기로 인물·연료·물자 등의 이동에 관해 일부 제재 예외를 인정해줬지만 철도 연결 사업 등 남북 경협에는 분명한 제동을 걸었다. 남북 관계 개선이 북한 비핵화 속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공개적으로 유럽 등에 대북 제재 완화를 요청하는 등 미국을 고립시키려는 듯한 시도를 했다. 이것이 미국 정부를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 정부가 한국의 기업·은행 등을 직접 접촉하면서 한국 정부를 통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한국 정부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도 한국 은행과 기업을 제재했을 때 벌어질 사태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 은행과 기업에 미국 정부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돼야 하는데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선 올 들어서만 개인·기관 등에 대한 대북 독자 제재를 9차례 했다. 6·12 미·북 정상회담 이후에만 6차례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까지 하지만 제재의 고삐만은 결코 놓지 않고 있다.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재 외엔 북을 비핵화로 이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북은 핵 폐기의 실질적 로드맵을 논의할 실무급 협상을 노골적으로 피하고 트럼프와 쇼만 벌이려고 한다. 여기서 한국 정부가 계속 '남북'에 과속하고 기업·은행의 등을 떠밀면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어떤 조치에 나설지 장담할 수 없다. 미국이 북한산 석탄 수입 대금 송금에 한국의 은행이 연루되고 평양 정상회담에 대기업 총수가 동행한 것을 어떻게 볼지는 분명하다. 만에 하나 미국이 제재의 칼을 빼들면 그 대상이 된 은행은 파산을 피할 수 없고 기업은 무역 자체가 어려워진다.
조선일보 A39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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