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끄지, 독재와 폭력을 증오한 아랍 지식인의 肖像

정시행 기자
입력 2018.10.19 03:03

빈라덴과 친분… 수차례 인터뷰… 9·11 테러 후엔 비판 칼럼 써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진 사우디 왕실은 왜 그리 잔인하게 '펜 하나'를 꺾었을까. 암살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사진〉의 30여년 행로를 들여다보면 격동의 중동 현대사에서 이슬람의 합리성과 자존심을 지키려 분투했던 한 지식인의 초상(肖像)이 드러난다.

카슈끄지가 기자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80~90년대 수차례 이뤄진 알 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과의 인터뷰다. 두 사람은 각각 1958년·1957년생 사우디 명문가 자제로 고교 때부터 친했다. 이슬람 교리에 빠진 빈 라덴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선 게릴라 항전(抗戰)에 참여했고, 카슈끄지는 미 인디애나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사우디의 영자 신문 기자로 아프간전 취재에 뛰어들었다. 무슬림인 카슈끄지는 당시 중동 젊은이들의 '반(反)서구 제국주의 독립운동'에 깊이 공감, 친구 빈 라덴의 인터뷰를 수차례 보도했다.

카슈끄지는 그러나 소련 붕괴 후 1990년대부터 반미(反美) 테러리즘으로 기운 빈 라덴과 멀어졌다. 1995년 수단에 은신한 빈 라덴과 마지막 인터뷰에선 "네가 전쟁을 고집하면 미국이 널 잡을 빌미만 주는 거야"라며 끈질기게 귀향을 권유했지만 실패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카슈끄지는 '테러리스트들은 세계무역센터뿐만 아니라 이슬람이란 관용과 공존의 신앙을 공격했다. 지옥문을 연 그들의 전철을 우리 아이들은 절대 밟지 말아야 한다'는 통한의 칼럼을 썼다. 2011년 빈 라덴 사망 뒤엔 '나는 무너져 울었다. 네가 증오심에 굴복하기 전 그 옛날 아프간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용감했는데!'란 글도 발표했다.

카슈끄지는 알제리전·걸프전 취재와 방대한 인맥, 생생한 필력을 기반으로 언론인으로 승승장구했다. 사우디 왕실과 집안의 친밀한 관계도 작용했다. 카슈끄지의 조부는 사우디 초대 국왕의 주치의였고, 삼촌은 전설적 무기 중개상 아드난 카슈끄지다. 카슈끄지는 왕족인 투르키 알파이잘이 1990~2000년대 사우디 정보국장과 영국·미국 대사를 지낼 때 고문을 겸해 '왕실 비공식 대변인' '중동과 서방의 가교(架橋)'로 불렸다. 그러나 2010년 최대 일간지 알 와탄 편집국장 시절 사우디의 정치·종교 개혁을 주장하는 외부 기고를 실어 해임되는 등 왕실·교계와의 대립도 피하지 않았다.

카슈끄지가 왕실과 본격적으로 멀어진 것은 2011년 아랍의 봄 때부터다. 그는 중동 각국의 독재 정권을 뒤엎은 민중혁명을 "진정한 이슬람 정신은 평등과 인간애"라며 지지해 사우디 왕실의 분노를 샀다. 2015년 무함마드 빈 살만(33) 왕세자의 집권 초반엔 그가 표방한 경제·정치 개혁을 지지했으나 반대파 숙청과 예멘 내전 개입 등 폭정을 목격하곤 "이슬람 세계를 퇴행·분열시킨다"며 비난했다. 사우디 내 활동이 불가능해진 카슈끄지는 지난해 말 미국으로 망명, 워싱턴포스트 등 외국 매체 기고 등을 통해 체제 비판을 계속해왔다.

결과는 참혹했다. 터키의 친정부 성향 예니샤파크는 17일(현지 시각) "수사팀이 확보한 현장 녹음을 직접 들었다"며 암살팀 요원들이 카슈끄지를 구타하고 손가락을 자르는 고문을 한 뒤 참수했다고 전했다. 알 오타이비 총영사가 "밖에 나가서 해라. 내가 곤란해진다"고 하자 암살팀의 한 요원이 "사우디로 돌아갔을 때 살아남고 싶다면 조용히 해"라고 위협하는 목소리도 녹음에 담겼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터키 당국자를 인용, "암살팀과 동행한 법의학자가 요원들에게 '난 시신 해체 때 안정을 위해 음악을 듣는다. 너희도 음악을 들으라'고 조언했다"고 했다. 예니샤파크는'카슈끄지 암살팀'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사우디 공군 중위가 최근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졌다고 18일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18일 "카슈끄지가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졌다"면서 그가 실종 직전 써놓은 미공개 칼럼을 게재했다. 마지막 칼럼의 제목은 '아랍이 가장 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였다.



조선일보 A18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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