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 한 수저에 뜨끈한 삶, 속이 해탈한다

광주=권상은 기자 칠곡=권광순 기자 평창=정성원 기자 전주=김정엽 기자 공주=김석모 기자
입력 2018.01.22 03:04 수정 2018.01.22 07:57

[전국의 국밥] [하] 경기·전북·충남·강원·경북

수십년 이어온 육수… 그 깊은 맛에 감탄

장사꾼 허기 달래준 전주 콩나물국밥
뽀얀 국물에 담백한 맛, 평창 황태국밥
노린내 없어요… 곤지암 소머리국밥
길손들의 취향 저격한 칠곡 순대국밥
대파의 그윽한 맛, 공주 소고기국밥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전북 전주에서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국밥집에 들렀다. 한 숟갈을 뜨려는데 주인 할머니가 알은체를 했다. "네놈은 박정희 대통령이랑 어찌 고로코롬 쏙 빼닮았냐!" 유심히 쳐다보던 할머니가 감탄했다. 곧이어 "옜다, 이놈아, 계란이나 하나 더 처묵어라"하며 귀하던 계란을 하나 더 얹어줬다. 할머니의 인심에 박 대통령은 무척 흐뭇해했다고 한다.

곤지암 소머리국밥. /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박 대통령이 계란 두 개를 얹어 먹던 것은 전주 콩나물국밥이다. '전국의 국밥' 상편에서 소개한 부산·경남·전남·충북의 국밥에 이어 경기·전북·경북·강원·충남의 국밥을 알아본다.

◇삼남 지방 장사꾼들, 콩나물국밥 허기 달래

전주 콩나물국밥은 20세기 초 장국밥으로 팔리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전주 남부시장은 삼남 지방에서 최대 규모로 항상 장사꾼들로 북적였다. 새벽 장에 나온 사람들은 콩나물국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전주 콩나물국밥은 조리 방법에 따라 남부시장식과 삼백집식으로 나뉜다. 멸치·다시마·무·대파·양파 등을 넣고 푹 끓여 육수를 내는 방식은 비슷하다. 남부시장식은 뚝배기에 밥과 삶은 콩나물을 넣고 미리 끓여 놓은 이 육수를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가 따라내며 서서히 덥혔다 말아낸다. 토렴이라고 불리는 과정이다. 왱이집과 현대옥이 이 방식으로 만든다.

뚝배기에 밥·콩나물 등의 재료를 넣고 육수를 부어 펄펄 끓이고, 손님상에 내기 직전 국밥 위에 달걀을 얹는 게 삼백집식이다. 달걀을 섞지 않은 상태에선 담백한 국물 맛을 맛볼 수 있고, 휘휘 저으면 걸쭉하고 텁텁한 맛이 난다. 박정희 대통령이 먹은 국밥은 삼백집식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인 강원 평창군엔 뽀얀 국물의 황태국밥이 유명하다. 황태로 국물을 낸 육수에 콩나물과 두부 등이 한가득 담겨 나온다. 담백하고 구수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평창군 대관령면엔 겨울마다 명태 수백 마리가 덕장에 층층이 널려 있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덕장에 걸어 둔 명태는 밤새 찬 바람이 불어 얼고, 낮에는 햇볕을 받아 녹기를 반복하며 황금 빛깔의 황태가 된다. 6·25전쟁 직후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이북과 비슷한 기후 조건을 가진 이곳에 덕장을 짓고 황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황태는 '신약본초'에서 해독의 신약으로 간주했을 정도로 해독에 탁월하다.

경기도 광주시에는 '곤지암 소머리국밥'이 있다. 곤지암 일대에 소머리국밥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음식점 10여 곳이 있다. 고소한 국물과 쫄깃한 고기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주변에 곤지암 리조트, 골프장 등 위락 시설이 많은 데다 중부고속도로 길목이라 나들이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곤지암 소머리국밥의 원조는 최미자(77)씨다. 가난한 살림에 병치레가 잦은 남편과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최씨는 생계를 위해 1981년 대폿집을 열었다. 1983년 성남 성호시장에 나갔다가 소머리국밥을 만들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시행착오 끝에 인삼으로 특유의 노린내를 잡았다. 갖가지 재료를 넣고 끓여 감칠맛을 내는 방법도 터득했다.

연탄불에 솥 3개로 시작한 최씨의 국밥 가게는 입소문을 타고 문전성시를 이뤘다. 차츰 주변에도 소머리국밥집이 생겨났다. 30년이 지났지만 곤지암에는 여전히 최씨의 이름을 내건 국밥집이 2곳이나 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가마솥에 사골을 5시간 끓이고 찹쌀가루와 수삼, 무 등 10여 가지의 재료를 넣어 육수를 우려낸다. 푸짐하게 담긴 소머리 고기와 우설 등을 양념장에 찍어 먹는 재미가 있다.

◇길손들 즐겨 찾던 칠곡 순대국밥·담백한 공주국밥

경북 칠곡군 왜관역(驛) 앞에는 반세기 넘게 길손이 즐겨 찾는 순대국밥집이 많다. 지난 17일 오후 왜관시장 입구에서 행인들에게 "순대국밥 잘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20여m 떨어진 점포를 가리켰다. 간판 이름부터 '진짜 중의 진짜'라는 뜻을 가진 '진땡이 순대국밥'이다. 하효진(39)·배민영(39)씨 부부가 운영한다. 40여 년 전 할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을 아버지가 운영하다가 10여 년 전부터는 하씨 부부가 가업으로 이어받았다. 국물 맛이 담백하고 개운하면서도 진하다. "국물 더 드릴까예." 한 그릇 뚝딱 비웠더니 식당 주인이 덤으로 내놓은 국물에 포만감이 밀려온다.

지난 17일 경북 칠곡군 왜관역 인근 순대국밥 집에서 주인장이 펄펄 끓는 국물에 밥을 데우고 있다. /권광순 기자
맛 비결은 24시간 이상 끓여 만든 육수에 있다. 암퇘지의 머리고기와 엄선된 내장 등으로 국물을 우려낸다. 국밥에 들어간 순대는 모두 수제로 만들었다. 잘 손질된 곱창에 선지와 당면, 여러 가지 야채를 듬뿍 넣어 두툼하다. 촉촉한 식감에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충남 공주에는 지역 이름을 딴 공주국밥이 유명하다. 사골을 끓여 육수를 내고 양지머리와 사태, 대파를 넣은 소고기국밥이다. 고춧가루를 넣어 붉은 빛깔이 도는 국물이지만 맵거나 짜지 않은 게 공주국밥의 특징이다. 1920년대 공주 시내를 지나는 제민천변에 열린 나무시장을 중심으로 국밥집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한다. 나무시장이 사라지고 한국전쟁이 나면서 당시의 국밥집은 모두 사라졌다. 공주국밥의 명맥을 이은 것은 고봉덕(1928~2011)씨다. 고씨는 1950년 공주 산성시장에서 처음 식당을 차렸다. 6·25전쟁 때문에 4년간 영업을 중단했다가 1954년 이학식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50여 년 동안 국밥을 팔았다.

지금은 고씨의 두 아들이 각각 이학식당, 새이학가든에서 공주국밥을 낸다. 고씨의 막내며느리이자 새이학가든을 운영하는 김혜식(61)씨는 "무는 적게 넣고 대파를 오래 끓여 깊은 맛을 내는 것이 시어머니의 비법"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A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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