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모아Zoom] 앉기 힘든 그 자리, 첫 국무총리 '수난史'

구성 및 제작 = 뉴스큐레이션팀 심지우
입력 2017.05.31 08:12 수정 2017.05.31 09:15

문재인 대통령이 지목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가 국회의 인준 절차를 무난히 통과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 과정에 난항을 겪었다.

이낙연 후보자는 배우자의 위장전입과 아들의 병역면제 등이 문제가 됐다. 특히 야당은 위장전입을 비롯한 5대 비리가 있으면 고위공직자 인선에서 원천배제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 배치된다며 인준을 거부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이 후보자 등의 위장전입과 관련, "지금의 논란은 준비 과정을 거칠 여유가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야당 의원들과 국민들께 양해를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입장 표명 직후 국민의당이 이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준에 협조하기로 하면서 의결정족수를 충족했다. 5월 31일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재적 의원 299명 중 188명 출석, 찬성 164명, 반대 20명, 기권 2명, 무효 2명)

초대 총리, 그 수난의 시작

역대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들은 임명 과정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 지명자 개인의 신상이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됐거나, 정치권의 힘겨루기 속에 임명동의안 처리가 정치적 공방으로 이어지며 인준안 통과가 지연됐다. 새 정부 출범 때마다 국정 운영 동력을 확보하려는 여당과 기 싸움에 밀리지 않으려는 야당이 팽팽하게 부딪친 결과다.

1954년 12월부터 1960년 4월까지는 부통령제가 도입돼 국무총리가 없었다. 5·16 이후 군정 기간은 장도영, 송요찬 등 4명이 내각 수반을 차례로 역임해 왔다.

8~10대 총리인 최두선, 정일권, 백두진 총리의 경우 대통령 임명제로 인해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았으나, 11대 김종필 총리 때부터 국회 동의제가 부활했다 6월 인사청문회제도가 도입되면서 여야 간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이낙연 임명동의안, 5월 31일 188명 참석·164명 찬성으로 국회 통과

초대 총리의 '수난史'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식 3일 전에 군 출신이자 호남 인사인 황인성 총리 후보자를 지명했다. 당시 호남과 3당 합당의 한 축이었던 민주정의당 배려 차원이었다. 그동안 군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데다, 아직 군사 문화가 남아있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1993년 8월 12일 저녁 7시 30분 긴급 임시국무회의에 참여하는 故김영삼 대통령과 故황인성 총리. /문화체육관광부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대선 당시 용공음해에 대한 사과 없이는 협조할 수 없다며 동의안 처리에 불참했다. 결국, 취임식 당일에 임명동의안이 처리됐다. 총리서리 체제로 내각이 가동됐고 총리 인준안은 그해 8월 17일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직전인 1998년 2월 김종필 전 자민련 명예총재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지만, 6개월간 '총리서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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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19일 오전 노동부의 업무보고를 받기위해 김종필 총리서리와 함께 과천정부청사에 마련된 업무보고장으로 들어서는 故김대중 대통령의 모습. /조선DB

선거기간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로 총리를 비롯한 경제·통일·외교 분야의 내각 추천권을 자민련에 주기로 해 총리 인선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김 후보자의 5·16 쿠데타 가담 전력, 도덕성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임명동의안 처리가 난항을 겪자 김 전 대통령은 정부 출범 후인 3월 3일 문민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 당시 총리의 제청을 받아 17개 부처 장관을 임명하고, 김종필 총리서리체제로 내각을 꾸렸다. 총리 인준동의안은 그해 8월 17일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03년 1월 고건 전 총리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자신의 개혁성향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연륜과 안정감이 강점인 중도보수 성향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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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8월 26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위해 참여한 故노무현 대통령이 (왼쪽)고건총리와 문희상 비서실장와 입장하는 모습. /조선DB

고건 초대 총리는 도덕성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평을 들었지만, 당시 거대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대북송금특검법 통과와 고건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를 연계시키면서 인준 절차가 늦어졌다. 결국, 대통령 취임식 이튿날 국회에서 특검법과 함께 총리 임명동의안이 처리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06년 12월 "보수진영과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고건 총리를 기용했는데 오히려 저하고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며 "결과적으로 실패해버린 인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었던 2008년 1월 한승수 당시 유엔 기후변화특사를 초대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으나 임명동의안 통과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이명박 정부 초기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인맥)와 강부자(강남 땅부자) 회전문 인사 등 내각의 측근 인사 기용 논란이 불거졌지만, 초대 총리만은 당선인과 특별한 인연이 없는 인사를 골랐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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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9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오찬을 함께한 이명박 대통령과 한승수 전 총리의 모습. /조선DB

그러나 부동산 투기·위장전입 의혹, 편법 증여·탈세 의혹, 군 복무 중 대학 졸업 논란, 아들 병역 특혜 논란 등이 제기됐다. 여기에 당시 야당인 민주통합당이 통일부, 여성부 폐지 등을 포함한 정부조직 개편안에 반기를 들면서 임명동의안 처리를 거부했다. 임명동의안은 대통령 취임식 나흘 뒤인 2월 29일에야 가까스로 국회 인준을 통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취임을 앞두고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을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1974~1975년 미성년자인 자녀 명의 부동산 투기 의혹, 두 아들의 병역 면제 등으로 지명 5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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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김용준 인수위원장이 총리 후보로 지명된 후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조선DB

김용준 후보자 낙마 이후 지명된 정홍원 총리도 검증 과정에서 위장 전입 사실이 드러났고, 아들 병역 면제 의혹, 검찰 퇴임 후 전관예우 의혹 등이 제기됐지만 인준 절차를 통과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 김용준·정홍원·안대희·문창극·이완구·황교안·김병준 후보자 등 7명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는데, 김용준·안대희·문창극·김병준 후보자는 청문회를 거치지 못하고 자진 사퇴하거나 지명 철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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