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별 ‘킹메이커’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이시연
입력 2017.02.13 08:19 수정 2017.02.13 14:52

‘킹메이커(Kingmaker)’란?

킹메이커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인을 권좌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지닌 정계의 실력자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 직접선거제가 도입된 이후 5년마다 선거운동과 투표를 거쳐 대통령이 탄생하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의 정책 공약·선거운동 방향 등을 설정하거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지지자들을 하나로 뭉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조력자를 킹메이커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13대~18대 대통령 /조선DB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을 만든 사람’을 알아봤다.

노태우 대통령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김윤환 /조선DB

노태우와 김영삼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은 故 김윤환이었다. 1987년 제13대 대선이 치러지던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김윤환은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에 참여해 막후에서 자신의 고교 동창생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원했다.

또, 제14대 대선 때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투사 이미지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민정당 내부 인사들을 설득해 강력한 지지 세력을 규합, ‘YS 대세론’을 굳혔다. 2대에 걸쳐 킹메이커 역할을 해내면서 정치권은 김윤환을 두고 ‘친화력을 갖추고 있으며 정국을 꿰뚫어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평을 했다.

그러나 1997년 ‘비영남 후보론’을 내세워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선출하면서 세 번째 킹메이커로 나섰지만 실패했다.

본명보다 ‘허주(虛舟·빈배)’라는 호(號)로 더 많이 불리던 그는 신문기자 출신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해 25년간 차관·청와대 정무수석·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직을 수행하는 동안 여당 사무총장 2번, 원내총무 2번, 정무장관 3번, 여당대표 2번을 지내는 등 화려한 정치 인생을 살다가 지난 2003년 암으로 별세했다.

김영삼 대통령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빈 배로 돌아간 정계의 풍운아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랐던 정치 세력은 ‘상도동계(YS 자택이 위치한 지역명)’라고 불린다. 서청원·김무성·정병국 등 여전히 정치판에서 영향력이 있는 다수의 전·현직 의원들이 상도동계에 속하지만, 故 김동영과 최형우를 빼놓고는 상도동계를 논할 수 없다.

이들은 YS가 야당 국회의원 시절인 197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다. ‘좌동영 우형우’로 불릴 만큼 실세 중의 실세였으며, 훗날 YS 회고록에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로 표현됐다.

김동영·최형우 /조선DB

김동영은 1966년 국회전문위원(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입법기능을 돕는 직무)으로 정계에 입문해 4선 의원을 지냈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주도해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민주자유당 창당에 기여했지만, 제14대 대선을 1년 앞둔 1991년 암으로 별세했다. 병을 숨기고 죽는 날까지 YS를 위해 일했다.

상도동계 행동 대장이던 최형우는 1980년 국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도 YS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YS가 발탁한 이래 6선 의원, 내무부 장관 등 정치 경력을 쌓다가 1997년 돌연 뇌졸중으로 정계 활동을 중단했다.

‘좌동영 우형우’와 더불어 김덕룡과 故 서석재도 원조 상도동계였다. 김덕룡은 국회의원 공보비서·당 총재 비서실장 등을 맡아 YS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고, 서석재는 상도동계 조직을 관리·운영하는 참모였다.

김대중 대통령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YS의 상도동계 현주소
김종필 /조선DB

1980~1990년대 김영삼·김대중과 함께 ‘3김(金) 시대’를 열었던 김종필은 충청도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5대 대선 때는 영호남이라는 두 축으로 지지층이 갈라져 있어 충청도가 ‘캐스팅보트(Casting vote)’ 지역이었다. JP의 지지 여부가 당선에 중요 변수였다.

호남 외에 지지 기반이 약했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에게 손을 내밀어 ‘DJP 연합’을 추진했다. 이념이 상반된 JP의 공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공동 정부 구성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후보는 DJ, 당선 시 국무총리는 JP, 내각책임제 개헌 등의 내용으로 DJP 연합이 성사됐고, 이를 통해 DJ는 충청표와 일부 영남표까지 얻어 당선됐다.

국민의 정부(DJ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된 JP는 실세형 총리로서 주요 인사와 정책에 권한을 행사했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과 대북 정책 등을 놓고 DJ 세력과 균열이 생기면서 DJP 연합은 깨졌다.

JP가 정계를 은퇴한 지 10여 년, 충청의 맹주(盟主)로 상징적인 인물이 된 그에게 지금도 많은 현역 정치인들이 조언을 들으러 찾아간다.

노무현 대통령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DJP 단일화] 국민회의-자민련 협약 전문
"국민은 호랑이… 사육사가 아무리 잘해줘도 언제 물지 모른다"

16대 대선 노무현 후보 유세 현장 /조선DB

16대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양강 후보는 부동의 지지율 1위였던 이인제와 ‘리틀 DJ’로 불리던 한화갑이었다. 그러나 부산 출신으로 당내 조직이 없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선에서 깜짝 승리해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인터넷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의 힘이었다. 노사모 회원들이 당 경선에서 국민 선거인단으로 참여해 표를 몰아줬던 것이다.

이후 노사모 회원들은 소액 헌금을 모금하고, 노무현이 유세하는 곳마다 노란 목도리를 메거나 노란 풍선을 들고 함께 했다. ‘기타 치는 대통령’ 등 노무현 후보를 알리기 위한 TV 광고도 노사모의 작품이었다.

네티즌들이 홍보 글이나 댓글로 정치인을 지지 또는 비판하는 정치 문화의 디지털화 역시 노사모에서 시작됐다. 온라인에서 노사모 활동은 젊은 층의 투표 참여로 이어졌다.

이렇듯 노사모가 재야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주도했다면, 공직에서는 민주당의 선거운동을 총지휘했던 선거대책위원장 정대철과 정치고문 김원기, 선거캠프의 전략을 짰던 이광재·안희정 등이 가까이서 도왔다.

이명박 대통령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달라진 선거운동] 세몰이 사라지고 미디어 선거 정착
[노무현 만든 사람들] 김원기·정대철 등 ‘공신’

이상득·이재오 /조선DB

“이상득이 없었으면 이명박은 없었을 것.”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항간에 떠돌던 말이었다. MB는 17대 대선 당시 기업인 출신 서울시장으로 화제의 인물이었지만, 한나라당 내 기반이 약했던 것이 단점이었다. 이때 당의 원로 그룹에 속했던 6선 의원 이상득이 뒷받침해줬다. 친동생을 대신해 당내 의원들을 만나 설득해 MB가 막강한 경쟁자 박근혜 후보를 제치고 경선 승리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BBK 주가 조작 사건에 휘말려 위기를 맞았던 MB가 대선 사흘 앞에 특검을 수용한 것도 이상득의 조언이 있었다.

** BBK 특검: 투자자문회사 BBK 대표 김경준이 같은 계열 회사 옵셔널벤처스를 인수한 뒤 주가를 조작해 300억 원대를 횡령한 사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의혹. 무혐의로 종결.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이재오는 MB가 대선 출마를 고려하던 초창기부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가다듬었던 최측근이었다. 캠프 내부에서는 이재오를 두고 MB 대통령 만들기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캠프에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할 정도로 헌신했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는 ‘박근혜 저격수’ 역할을 자처해 공을 세웠고, 당선 이후에도 이른바 친이(親李)계를 결집하며 영원히 MB의 남자로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 (2013년 2월 25일~ 現)

MB 후보 경선부터 청와대행까지 일등공신
'이명박의 야전사령관' 이재오는 누구?

18대 대선 박근혜 후보 유세 현장 /조선DB

‘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 ‘선거의 여왕’ 등 박근혜 대통령의 대세를 뒤집을 보수 후보는 없었다. 그래서 친박(親朴)이라는 이름 아래 보수진영의 대부분 인사가 모여 백의종군했다. 캠프 총괄선대본부장 김무성, 전략가 권영세, 공보 책임단장 이정현, 비서실장 최경환 등이 대표적이었다. 당선된 이후 이내 진박(진짜 친박), 원박(원조 친박), 멀박(멀어진 친박), 비박(비박근혜) 등으로 세력이 뿔뿔이 흩어졌다.

박근혜 후보의 경제 전문성을 보완해준 참모는 김종인과 김광두였다. 김종인은 ‘경제 민주화(대기업에 쏠린 부를 법으로 완화)’를, 김광두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를 내걸고 박근혜 후보 경제 정책의 틀을 만들었다. 이에 박근혜 후보는 경제 분야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모두 수용한 정책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김종인·김광두·안대희·이상돈 /조선DB

또, 18대 대선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쇄신도 중요한 화두였다. 유권자들에게 박근혜 후보의 정치 쇄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데는 안대희와 이상돈의 영입이 큰 몫을 했다. 안대희는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맡아 ‘국민 검사’ 칭호가 붙어 있었고, 중도 보수 성향이었던 이상돈은 개혁 보수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멘토’였던 이들은 현재 야권 인사로 활동하거나 정계에서 사라지는 등 박근혜 대통령의 곁을 떠나 있다.


오랜 동지인 친박, 격전지 누비며 백병전
경제 큰 틀은 김종인·김광두, 실무는 안종범·강석훈

‘정치와 선거의 기술(이철희著 ·지식공작소刊)’이라는 책에 ‘지도자는 역사를 만들고 참모는 성공을 만든다’라는 구절이 있다. 훌륭한 참모 없이는 지도자가 성공할 수 없다는 의미다. 역대 대선 주자들이 당선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킹메이커가 조타수 역할을 충분히 해냈기에 가능했다.

2017년 대선 정국에서는 누가 킹메이커로 두각을 나타낼지 기대가 된다.

3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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