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대중의 분노로 작두에 올라타지 말라"

입력 2016.12.16 03:06

스스로 개혁 못 하는 우리, 이 절호 기회 놓쳐선 안 돼… 그러나 극단론은 경계해야
"모두 다 뒤집자"는 곤란… 대중의 분노에 올라탄 선무당 개혁 굿판은 안 된다

박정훈 논설위원
언제부턴가 우리는 자발적 개혁 능력을 잃은 나라가 됐다. 아무리 병폐가 목까지 차올라도 스스로 고치지 못하는 해결 불능(不能)의 나라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국회에 발목 잡힌 노동 개혁만 봐도 그렇다. 낡은 노동제도가 문제라는 국내외 경고가 숱하게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국회는 꿈쩍도 않고 여태껏 노동 개혁 법안을 뭉개고 있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야 정신 차리는 체질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 위기가 그랬다. 대기업의 빚잔치 경영이 위험하다는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기업도, 정부도 뒷짐만 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다 더 물러설 곳 없는 국가 부도의 벼랑에 몰리고야 수술에 나섰다. 지연된 개혁 때문에 수많은 월급쟁이가 실직하고 애꿎은 자영업자들이 파산했다.

비관론이 판치는 와중에 일본 노무라증권이 색다른 보고서를 내놓았다. 최순실 사태가 가져올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라는 내용이다. 보고서를 쓴 권영선 전무는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에 투자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혁에 나선다면 국가 업그레이드의 호재가 된다. 일거에 '중진국 함정'을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국가 시스템을 개조할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나라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변화를 바라는 열망은 보수와 진보, 청년과 장년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온 나라에 개혁 공감대가 형성됐던 예는 흔치 않다.

촛불 집회의 수백만 군중을 보고 어느 외국 투자가는 18년 전 금 모으기 운동을 떠올렸다고 했다. 외신들은 위기 때 분출하는 한국민의 저력을 확인했다고 쓰고 있다. 변혁을 원하는 국민 에너지는 외환 위기 때 못지않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낡은 제도와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 나온 중·고교생 시위대의 발언이 언론에 소개됐다. "우리가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을 갓조선(최고의 한국)으로 만들겠습니다." 청소년 사이에서 '갓(god)'은 최고란 뜻의 접두사라 한다. '최고의 한국'이라니, 우리가 갈 방향을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낸 말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최고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다가올 대선에선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고칠지가 핵심 이슈가 돼야 한다. 이를 토대로 차기 정부가 개혁 프로그램을 짜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분위기에 편승해 온갖 것을 다 뒤집자 하는 극단적 흐름이다. 촛불 인파 속에 옛 통진당 세력이 등장했다. 야당의 대권 후보들은 선명성 경쟁을 치닫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겠다 한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권 후보는 '국가 대청소'를 내세웠다. '대청소'란 말이 프랑스대혁명의 단두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진다. 야권 2위 후보는 재벌 해체론으로 치고 나왔다. 재벌은 고칠 곳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체'라니, 이건 선동에 가깝다.

대통령 퇴진이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고칠 것은 고치고, 지킬 것은 지키는 옥석(玉石) 판단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무엇을 고칠 것인가. 권력이 사정 기관을 동원해 기업을 겁박하는 후진적 통치 구조를 수술해야 한다. 대통령의 잘못된 지시를 무조건 추종하는 영혼 없는 공직 문화를 고쳐야 한다. 집회 현장의 고교생들은 "대학도 '빽'으로 가는 나라가 싫다"고 외쳤다. 돈과 '빽'이 통하는 부패 사슬을 잘라야 한다.

무엇을 지킬 것인가. 국가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 통진당 해산은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집단에 대한 헌법적 결정이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이것이 흔들려선 안 된다. 대한민국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선 더욱 눈을 부릅떠야 한다.

외교와 안보의 축이 흔들려선 안 된다. 야당은 미국과 합의가 끝난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연기를 요구하고 있다. 한·일 정보교류협정과 위안부 합의도 흔들 기세다. 그러나 대외 협상을 마음대로 뒤집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국가 간 합의를 번복한다면 후진국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경제의 성장 동력을 키우려는 정책들도 지켜져야 한다. 규제 완화와 좋은 기업 환경 만들기가 중단돼선 안 된다. 아무리 박 대통령이 미워도 노동·공공·교육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기회가 왔는데도 개혁을 못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그러나 개혁의 완장 아래 선무당 굿판이 벌어진다면 이것 또한 큰일이다. 지금 그런 조짐이 보인다.

같은 야권이 보기에도 걱정되는 걸까. 또 한 사람의 대권 주자인 안희정 충남지사는 "대중의 분노로 작두를 타선 안 된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무리 흥이 올라도 포퓰리즘의 작두에 올라탔다가는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간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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