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1945년 포츠담 회담] 日帝 패망·한반도 분단 함께 가져온 '포츠담 선언'

취재=(포츠담)허동현 경희대 교수·이한수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2015.08.13 07:30 수정 2015.08.13 09:56

독일 수도 베를린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30여 분 달려 인구 15만명 소도시 포츠담에 닿았다. 포츠담 역에서 다시 버스로 20분이 걸렸다. ‘궁전’이라 하기엔 소박하고 아담했다. 포츠담회담이 열린 체칠리엔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은 붉은 기와지붕과 검은 나무로 벽면을 장식한 ‘ㅁ(미음)’자형 2층(일부 3층) 건물이다. 1917년 독일 호엔촐레른 왕가 빌헬름 황태자가 아내 체칠리에를 위해 지은 집이다. 70년 전 이곳에서 미국·영국·소련 세 나라 수뇌가 머리를 맞대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을 논의했다.

독일 포츠담 체칠리엔호프 궁전에서 1945년 7월 17일부터 열린 미국-영국-소련 세 나라 정상의 회담 모습. (NARA)

회담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열렸다. 두 달 전(5월 8일)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미·영 연합군이 압박했다.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나치 총통 히틀러는 소련군의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4월 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독일을 처분하는 일은 승전국 세 거두에게 달려 있었다. 앞으로 과제는 항복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일본이었다.

애초 회담은 독일 점령의 상징적 의미로 나치 심장부인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변변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표들이 묵을 숙소도 마땅치 않았다. 회담 장소를 물색하려고 베를린을 둘러본 영국 서기관 조이 헌터는 “우울하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극심한 폭격으로 시내는 온통 폐허였다. 뼈가 앙상한 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걸했다”고 회고했다. 인근 포츠담은 사정이 나았다.

체칠리엔호프 궁전은 폭격을 피했다. 회담 장소 정비는 지역을 점령한 소련이 맡았다. 정원 한복판에 붉은색 제라늄을 커다란 별 모양으로 심었다. 붉은 별은 스탈린의 상징이다. 자기가 회담 주도자라는 과시였다. 지난 6월 10일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도 건물 앞 정원의 ‘붉은 별’ 모양 꽃 장식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매년 정기적으로 꽃을 심어 회담 당시 모습을 재현한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독일로서는 아픈 기억일 테지만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결의로 느껴졌다.

회담장은 기념관으로 보존됐다. 집기를 재현하고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과 설명문을 붙였다. 건물 중앙 옛 황태자의 ‘백색 응접실’ 왼쪽 공간에 놓인 커다란 원탁 중앙에는 미국·영국·소련 국기가 여전히 꽂혀 있다. 70년 전 각 국기 방향으로 트루먼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앉았다. 각국 정상 왼편에는 통역사, 오른편에는 각국 외무장관이 배석했다.

수뇌 셋은 한자리에 앉았지만 속셈은 달랐다. 회담이 막을 올린 7월 17일은 미국이 뉴멕시코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다음 날이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1945년 4월 12일 사망)에 이어 처음으로 회담 대표로 나섰다. 전임 루스벨트는 얄타회담(1945년 2월 4~11일)에서 일본과 치르는 전쟁에 소련이 참전할 것을 종용했다.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해 일본군을 공격하면 미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스탈린은 그 대가로 러·일전쟁 패전으로 빼앗긴 사할린과 쿠릴열도 등의 영토를 돌려받기로 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와 생각이 달랐다. 핵무기 확보로 태평양전쟁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소련의 참전 없이도 일본에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종전 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면 참전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으면 됐다. 애초 5월 중순으로 예정했던 회담을 원폭 실험 성공을 기다리며 두 달이나 연기한 까닭이다. 스탈린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일본 군부와 은밀히 접촉 중이었다. 소련과 일본은 5월 15일부터 비밀 교섭을 벌였다. 일본이 얄타회담 합의 이상의 영토를 할양한다면 소련은 태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

미·소의 첩보전은 치열했다. 미국은 회담 직전 암호를 해독해 소련과 일본의 접촉을 간파했다. 트루먼은 회담에서 다시 태도를 바꿨다.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확답을 요구했다. 우선 소련과 일본이 손잡는 것을 차단해야 했다. 소련도 미국의 원폭 개발 사실을 알았다. 회담 1주일째인 7월 24일 트루먼이 “우리는 다른 무기보다 강력한 파괴력이 있는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하자 스탈린은 짧게 답했다. “축하합니다. 그 무기를 훌륭히 쓰기를 바라오.”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그로미코는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스파이를 통해 미국의 원폭 개발을 이미 알았다”고 썼다. 처칠은 폴란드 서부 국경선과 이탈리아의 지중해 식민지 처리 등 유럽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회담 중간인 7월 25일 귀국해야 했다.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졌기 때문이다. 26일부터는 선거에서 이긴 새 총리 애틀리가 회담을 대신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은 26일 나왔다. 일본은 거부했다. 미국은 8월 6일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일본은 나가사키에 9일 원폭이 떨어진 직후에야 항복 의사를 밝혔다. 스탈린은 미국의 원폭 투하로 전황이 급변하자 8월 7일 대일전 참전 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소련군은 만주로 진격하고 한반도의 나진·웅기를 폭격했다. 13일에는 청진에 상륙해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포츠담 체첼리엔호프궁전

포츠담회담에서 한국 문제는 주요 의제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을 ‘적절한 절차’에 따라 독립하게 한다는 카이로회담을 재확인하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미·소가 회담 과정에서 밀약을 통해 38선을 남북으로 가르는 군사 점령 분할선을 정했다는 ‘포츠담 밀약설’이 최근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선에서 소련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고 여겼다. 냉전과 한반도 분단의 씨앗은 포츠담에서 이미 뿌려지고 있었다.

포츠담 기념관 전시물 중에는 한국민들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일제를 패망시킨 두 나라를 환영하는 사진이 있다. 당시 해방의 기쁨에 취한 한국민은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이 드리울 어두운 그림자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징전비후(懲前毖後·과거의 잘못을 교훈 삼아 후일을 경계함)’의 교훈을 되새기는 전략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한반도는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휘말려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아픈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공동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

 
"美와 소련의 냉전 없었다면 지금껏 한국 분단도 없었을것"
효성 탄소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