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i'와 'Oxi'로 갈린 아테네 도심 광장

아테네=한경진 특파원
입력 2015.07.02 03:00 수정 2015.07.02 10:28

["직원 월급 줄 돈이 없다… 하지만 더 힘든 건 미래가 안보이는 것"]

-그리스 디폴트 현장 르포
채권단案 찬성파 대규모 시위
전날엔 반대파들이 광장 장악… 거리서 만나자 물병 던지며 다퉈

-무너지는 서민경제
"2700원짜리 닭 한마리도 선뜻 집어들 수가 없네요"

-국민 분열
"EU 탈퇴" "그리스는 유럽" 길거리서 멱살잡이도

-기댈 지도자가 없다
위기의 근원은 現야당 때문 "치프라스도 野대표도 싫다"

아테네=한경진 특파원
지난 30일 오후 7시 30분쯤(현지 시각)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광장 일대는 푸른색 유럽연합(EU) 깃발로 뒤덮여 있었다. 오는 5일 국제 채권단이 제시한 구제금융 최종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찬성파'들이 참석한 집회였다. 자영업자 고르기스(24)씨는 "나도 긴축정책이 싫지만 그렇다고 유로화를 버리면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며 "현실이 힘들다고 지옥으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그리스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부채 16억유로(약 2조원)를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IMF 71년 역사상 '선진 경제국(advanced economy)' 중 첫 채무 상환 실패라는 오명도 남겼다. 더구나 2010년 이후 계속된 1, 2차 구제금융도 이날 만료됐다. 외부에서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히면서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는 혼돈 속으로 한발 더 다가가게 됐다.

하루 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선 구제금융을 거부하자는 '반대파'의 시위가 열렸다. '채권단을 쓰러뜨려라' 'EU에서 나가자'와 같은 구호가 하루 사이에 'EU에 붙어 있자' '그리스는 유럽이다'로 바뀐 셈이다. 디폴트만큼이나 그리스를 위협하는 것은 국민 분열이다. '네'(NAI·예)와 '오히'(OXI·아니오)를 외치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다. 신타그마광장 부근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선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20대 청년 수백명이 거리 행진을 벌였다. 붉은 깃발을 든 이들은 가슴에 'NAI' 배지를 단 '찬성파' 국민을 만나자 느닷없이 물병을 던지고 휴대전화를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무장 경찰도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학생 카라소울리(22)씨는 "단합하고 희생하며 견디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도 없다. 미래가 없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현금을 달라" 연금 수급자들의 아우성 - 1일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한 은행 앞에서 연금 수급자들이 입장 순번표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앞서 지난 29일 그리스 정부는 현금자동지급기(ATM) 인출 금액을 하루 60유로(약 7만5000원)로 제한하고 은행 문을 닫았다. 이에 연금 수급자 상당수가 현금카드가 없어 현금자동지급기를 이용 못 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리스 정부는 1일 전국 은행 1000여곳을 열어 1인당 최대 120유로의 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AP 뉴시스
5일 국민투표가 무산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나온 현지 일간지 '에피메리다 톤 신탁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4%가 투표 때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답했다. 찬성하겠다는 응답은 33%에 그쳤다. 불과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서 찬성 응답이 더 많았던 상황이 뒤집어진 것이다.

◇극에 달한 정치권에 대한 불신

지금 아테네에서 현금을 찾으려면 현금자동지급기(ATM)를 최소 대여섯 곳은 돌아다녀야 한다. ATM에 돈을 채워 넣어도 금방 동나기 때문이다. 1일부터는 그나마 하루 인출 한도인 60유로를 온전히 찾기도 어렵다. 20유로짜리 화폐가 부족해 50유로짜리 화폐만 내미는 ATM이 많다. 아나스타샤(62)씨는 "내일이면 50유로짜리도 없어 현금 인출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오는 5일 국민투표가 끝나더라도 은행 영업 제한이 풀리지 않고 예금 인출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과연 이번 사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스 정부는 협상 마감이 임박해 채권단에 3차 구제금융을 제안했다. 외신들은 막판 협상 타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긴급히 전했다. 하지만 정작 기자의 주변에 있는 그리스인들은 상황을 비관하고 있었다. 한 호텔 직원은 "새 제안서를 읽어보는 데만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며 "치프라스 정부가 '보여주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에 대한 기대감도 크지 않았다. 지금의 위기를 몰고 온 장본인이 야당인 신민주당과 사회당이기 때문이다. 자영업자인 코라키스씨는 "치프라스 총리도 싫지만, 뺀질뺀질 웃는 사마라스(신민주당 대표)는 더 싫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국가 부도를 맞은 그리스인들이 위기를 피해 호주·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고 있다"며 "2008년 이후 호주로 이민 간 그리스인이 1만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정치에 배신당한 국민이 결국 조국을 등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용카드 없는 연금 수급자들, 은행 앞 긴 행렬

1일(현지 시각) 그리스 아테네 오모니아광장 인근의 바르바케이오스 시장. 평소 이른 아침부터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러 온 식당 주인이나 주부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닭고기 도매상을 하는 치로니스씨는 판매대에 있던 닭고기를 반 마리씩으로 자르고 있었다. "한 마리 2.2유로(약 2700원)에 팔았는데, 사가는 사람이 없어요. 반 마리씩 1.3유로에 팔아볼까 해요."

하루 예금 인출이 60유로(약 7만5000원)로 제한된 아테네 시민들은 닭고기 한 마리도 선뜻 집어들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시장 중앙도로 100여곳 점포 가운데 10여곳에는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었다. 지난 29일 갑작스러운 은행 영업 금지 조치로 미처 물건을 들여 올 돈을 마련하지 못한 가게들이었다. 치로니스씨는 "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다"며 "나도 내일이면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날도 은행에는 오전부터 연금 수급자 수십명이 모여 있었다. 그리스 정부는 신용카드가 없어 현금을 인출할 수 없는 연금 수급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전국 은행 1000개 지점을 다시 열어 1인당 최대 120유로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루라 시카(67)씨는 "은행이 돈이 없어 연금을 절반밖에 주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불안해서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디폴트(default)

국가나 기업의 부도, 개인의 파산처럼 부채를 갚을 때가 됐는데도 이자 지불이나 원금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 국가가 디폴트되면 '국가부도'이다. 그리스가 IMF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도 IMF가 디폴트가 아닌 '체납(arrears)'으로 처리하는데, 금융 시장에서는 이를 사실상의 디폴트로 간주한다.


조선일보 A1면
말모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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