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바둑인생 58년… '戰神'조훈현

곽아람
입력 2015.06.19 16:43 수정 2015.06.22 23:06

"졌던 대국이 더 기억에 남아… 쓰라린 복기로 이기는 법 배웠다"
"최정상의 시절, 15세 제자에 반집차로 졌다
한번 미끄러지자 순식간에 無冠의 신세로…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15세 바둑 신동(神童) 스승 조훈현(曺薰鉉) 꺾었다."

1990년 2월 3일, 전국 조간신문에 일제히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 시절 '바둑 황제' 조훈현(당시 37세)의 이름이 신문에 등장하는 건 일상다반사였지만, 이날 뉴스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제자 이창호에게 쏟아졌다. 전날 열린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반집 차이로 졌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같은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창호는 조훈현의 내제자(內弟子·스승과 함께 살며 배우는 제자)로 7년째 한집에 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조훈현의 마음은 복잡했다. 제자에게 졌다는 고통과 제자를 잘 키웠다는 기쁨이 동시에 밀려왔다.

조훈현이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잉창치배(應昌期杯)에서 중국의 녜웨이핑을 꺾고 '바둑 세계 챔피언'에 등극, 김포공항에서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하며 개선 행진을 벌인 것이 겨우 5개월 전인 1989년 9월이었다. 최정상에 오른 직후 맛본 패배라 그가 느낀 낙차(落差)는 더욱 컸다.

한 번 미끄러지자 추락하는 건 순간이었다. 그 후 스승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판판이 졌다. 1990년 9월 국수전에선 3대0으로 졌고, 1991년엔 대왕전, 왕위전, 명인전 등 타이틀 세 개를 이창호에게 빼앗겼다. 1991년 말이 되자 이창호는 7관왕으로 올라섰고, 조훈현은 4관왕으로 내려앉았다. 1995년 2월 그는 이창호에게 마지막 남은 대왕 타이틀마저 빼앗겼다. 1974년 최고위전에서 우승한 지 20년 만에 그는 아무런 타이틀도 없는 무관(無冠)의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데 신기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화로웠다. 모든 걸 잃어버렸는데도 기이하게 홀가분했다. 며칠간 실컷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가진 게 없으니 더 이상 내려갈 일이 없잖아.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거야' 긍정적인 생각이 마음속에서 마구 솟아올랐다."

조훈현은 지금까지 2700판이 넘는 대국을 치렀고, 그 중 1900판 정도를 이겼다. 그는 “사실 내가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지는 거다. 프로 기사들의 경우 실력은 비슷하다. 누가 자신의 100%를 다하느냐에서 승패가 갈린다. 인간이 100%를 다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상대가 무너지게 돼 있다”고 했다. 지면 우측 상단의 ‘無心’은 조훈현의 좌우명으로 자신이 직접 쓴 휘호이다. / 이태경 기자
지난 16일 서울 평창동 자택, 백발이 성성한 조훈현(62)이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팼다. 면바지에 남방셔츠 차림의 그는 반상(盤上)을 호령하는 매서운 승부사라기보다는 온화한 노(老)학자처럼 보였다. 조훈현은 지금까지 2700판이 넘는 대국을 치렀고, 그중 1900판 정도를 이겼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긴 대국보다 진 대국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잉창치배 같은 세계적인 바둑 대회에서 승리한 기쁨보다 제자 이창호한테 반집 차이로 패배한 기억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는 패했을 때의 소회와 깨달음을 돌이켜 최근 에세이집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을 냈다.

"살려고 패배를 인정했다"

―바둑계에서 당신에게 붙인 별칭이 '전신(戰神)'이다. '싸움의 신'이 승리보다 패배를 더 오래 기억하다니 의외다.

"이기면 후회가 없다. 결과가 좋은 거니까. 지는 건 다르다. 지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아팠거나, '농땡이'를 쳤거나,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거나…. 왜 졌는지 생각하고 후회하고 다음 대국을 위해 새로운 다짐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긴 대국보다는 진 대국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게 된다."

―한창 나이인 37세 때 15세 제자 이창호에게 패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참담하지 않았나.

"충격이 컸다. 당시 나는 최고수였다. 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서로 바둑판 위에서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사이인데 아침마다 집을 같이 나서는 것도 고역이었다. 1991년 창호가 독립해서 나갔다. 그 무렵 창호와 경기를 할 때면 힘들어서 쓰러질 지경이 되곤 했다.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의자에 거의 드러누운 자세로 바둑을 뒀다. 언론에선 이를 '와기(臥棋·누워서 바둑을 둠)'라며 점잖게 표현해 주었지만, 사실 나는 창호를 방어하느라 몸이 무너져내릴 지경이었다. 내가 쌓은 모든 관록과 경험이 젊음의 힘과 패기 앞에서 무기력했다. 젊음이 가장 무섭다."

―바둑은 '사유(思惟)의 승부' 아닌가.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수를 내다보는 사유도 깊어질 텐데 젊은 사람에게 밀린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다.

"(웃으며) 나도 이해가 안 간다. 예술에선 연륜이 중요하겠지만 바둑엔 묘하게 체력적인 게 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승부를 내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 안에 자기 안의 모든 걸 끌어올릴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나이가 들수록 힘들다. 10대 땐 스펀지로 빨아들이듯 받아들이고, 20대 때 절정에 오르게 된다. 이후론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달까, 좀처럼 쌓이지 않는다. 나만 해도 옛날엔 신수(新手)가 나오면 혼자 터득했지만 요즘은 후배한테 물어봐 익힌다. 그런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정신력도 차이가 난다. 10대 땐 꿈속에서도 바둑 생각밖에 안 한다. 그런데 20대가 되면 어디 그런가. 술 생각도 나고, 돈벌이 걱정도 해야 하고…. 거기다 데이트라도 하게 됐는데 상대 여성이 예뻐 봐라. '내일 또 만나야 하나, 어떻게 잘해줄까' 생각하게 되는 게 청년으로서 당연한 게 아닌가. 100% 바둑에만 전념하는 사람과 다른 생각 할 것이 많은 사람이 맞붙는다면 나이가 어리더라도 집중하는 사람이 이기게 돼 있다." 

―그래도 모든 타이틀을 다 빼앗기고 나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했다.

"살려고 그랬겠지. 계속 고통과 분노에 싸여 있으면 죽는 길밖에 없으니까 마음을 그렇게 먹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바둑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창호한테 졌다고 해서 내가 평생을 바친 바둑을 두고 딴 길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당시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곤란한 상황에서 '나는 안 돼' 하고 좌절해 버리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내가 당시 '나는 끝이야' 했다면 인생이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따는 일만 남았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기 때문에 재기가 가능했던 것 같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건가.

"그렇다. 막상 다 잃어버리고 나니 자유로웠다. 무관이 된 후 예전보다 더 열심히 대회에 나갔다. 1996년 한 해에만 110국을 치렀다. 사흘에 한 번꼴로 바둑을 둔 셈이었다. 예전처럼 타이틀 방어자로 꼭대기에서 도전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본선부터 시작해 토너먼트를 모두 거치고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도 이기고 지는 걸 반복했지만 승패에 정말로 초연해진 건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수많은 판을 싸우면서 나는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조훈현은 1998년 국수전에서 도전자로 이창호와 다시 맞붙었다. 결과는 조훈현의 승리였다. 그는 "창호에게 이기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조훈현은 “젊은 시절의 나는 패배가 싫었다. 울었던 적은 없지만 울고 싶었던 적은 많았다. 바둑에 진 날이면 혼자서 밤길을 걷다가 지칠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고 했다. / 이태경 기자
4세 때 훈수 둔 바둑 신동

조훈현은 바둑 신동(神童)이었다. 1957년 전남 목포. 만 4세의 조훈현이 사촌 매형과 바둑을 두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막으며 "아버지, 거기 놓으면 안 돼요!" 하고 제지했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나' 했던 아버지는, 나중에 복기를 하면서 바로 아들이 막았던 그 수가 패착에 가까운 수였다는 걸 알게 됐다. 혹시나 하여 바둑돌을 쥐어주었더니 꼬마 조훈현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집이 많으면 이긴다는 바둑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내 아버지를 이기기까지 했다. 어느새 목포 바닥에 '바둑 신동'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1958년 겨울 아버지 조규상은 조훈현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했다. 갓 결혼한 큰딸의 보문동 셋방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아들의 손을 잡고 당시 한국 바둑의 중심이었던 명동의 송원기원으로 매일 출근했다. 당시 송원기원의 주인은 한국 현대바둑의 대부로 통하는 조남철(1923~2006). 목포에서 온 바둑 신동에게 흔쾌히 지도 대국을 허락한 조남철은 두 판을 연달아 두며 조훈현의 기력(碁力)을 시험한 후 '강한 8급'으로 급수를 인정해 줬다. 상경한 지 4년이 지난 1962년 10월, 조훈현은 9세의 나이로 제16회 프로 입단(入段) 대회를 통과하며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4세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혼자 바둑을 깨우치는 게 어떻게 가능했나.

"나도 궁금하다. 아버지가 바둑 두는 걸 우연히 보고 '포위되면 죽고, 집을 내면 산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음악 분야에서도 스스로 깨치는 신동이 있지 않나. 나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집중 시간이 짧은 어린아이가 바둑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승부욕 때문이었나.

"이기고 싶다기보다는 강해지고 싶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하루에 4시간이든 6시간이든 공부를 한다. 그중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과목이 생기면 몰두하고, 전교 1등도 하는 거다. 내 경우엔 좋아하는 과목이 바둑이었던 셈이다."

소년 프로기사의 탄생 소식에 후원자들이 열광했다. 바둑계 원로 이학진이 조훈현의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1963년 10월 조훈현은 일본으로 떠났다. 항공료는 조선일보사에서 부담했다. 조훈현의 일본 스승은 당시 74세였던 세고에 겐사쿠(1889~1972). 현대 일본 바둑을 태동시킨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훈현은 세고에의 마지막 내제자로 9년간 그와 함께 살았다.
10세 때인 1963년 조선일보에 일본 유학 소식을 알린 ‘소년 기사 조훈현’/ 조선일보 DB
―재일교포 후원자가 인사치레로 입문을 청했는데 세고에가 두 판을 둬 본 후 제자로 삼았다고 들었다. 세고에로부터는 뭘 배웠나.

"바둑보다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선생님은 내게 '고수가 되기 전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인격, 인성, 인품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금한 내기바둑을 두었다가 파문당할 뻔한 적도 있다. 어릴 땐 계속 '사람이 돼라'고 하시길래 속으로 '내가 사람이지 그럼 짐승이야' 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선생님의 뜻을 알겠다. 잔꾀를 쓰는 프로기사들이 추락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정상의 무게를 견뎌낼 만한 인성이 없으면 잠깐 올라섰다가도 곧 떨어지게 되더라."

―세고에는 제자를 평생 딱 세 명만 받았다. 세계 바둑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중국의 우칭위안과 일본의 바둑 천재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조훈현이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이류는 서러워. 쿤겐(훈현의 일본식 발음), 네가 이 길을 가기로 했다면 일류가 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불쌍해.' 선생님이 제자를 단 세 명밖에 받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불쌍한 인생을 만들까 봐 오직 일류가 될 사람만 뽑아 받으신 거다."

세고에는 1972년 조훈현이 병역 문제로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와 후배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었다.

"생계를 위해 뒀다"

 한국에 돌아와 군입대를 기다리던 조훈현이 어느 날 "기원에 가야 하니 차비를 달라"고 하자 어머니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어머니가 옆집에서 꿔온 돈으로 택시를 타고 나가면서 조훈현은 '내가 벌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조훈현은 "그때 주변을 돌아보니 집안에 돈을 벌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더라. 바로 그 순간 바둑이 내 직업이고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사무쳤다"고 했다.

―입대 직전 부산일보에서 주최하는 최고위전에 출전해 우승했다. 당시 상금이 꽤 됐을 텐데.

"30만원 정도였는데 당시로선 거금이었다. 그 돈을 몽땅 어머니께 드렸다. 마침 여동생이 미대에 합격해 등록금이며 화구(畵具)며 돈 들 일이 많았는데 가계에 꽤 보탬이 됐다. 그 이후로 나는 생계를 위해 바둑을 둬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생계를 위해 바둑을 두다니?

"프로란 이겨서 돈을 버는 사람이다. 한판이라도 이겨야 돈이 된다. 자식으로서, 결혼한 이후엔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내겐 바둑밖에 길이 없었다. 이겨야만 여유가 생겼다. 그 책임감 때문에 더 열심히 뒀고, 그러다보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

―결국 바둑도 밥벌이라는 이야기인가.

"직업이란 기본적으로 생계를 위한 것이다. 내가 바둑을 열심히 해서 타이틀이 하나씩 쌓여갈 때마다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부모님은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셨고,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달동네의 아주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 그렇게 가난한 집 아이였던 내가 바둑을 통해 내 영토를 넓혀가면서 차차 삶의 영토도 넓어졌다. 달동네에서 화곡동 양옥으로, 연희동 2층 양옥으로, 그리고 지금 집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노력한 만큼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큼 가장 확실한 동기 부여가 있을까."

―직업을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달라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그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 '당장 어떻게 먹고살지 막막해서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마음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더 중요한 건 먹고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저 먹고사는 길부터 뚫어야 한다. 생계가 막히면 꿈이고 뭐고 없다. 치사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게 현실이다."

조훈현은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TV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의 꿈속 스승으로 깜짝 출연했다. 그는 "'미생'을 보니 살아남는다는 것은 바둑판 위에서나, 사회에서나 쉽지가 않더라"고 말했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매일 퇴근 후 하루를 복기(復碁)한다. 바둑에서 '복기'란 어떤 의미가 있는 행위인가.

"복습이자 미래를 위한 설계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이미 승부가 결정된 대국을 다시 펼쳐보인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겠다.

"진 사람은 쓰라리다. 그게 복기의 가장 어려운 점이다. 프로기사들의 경우 지고 이기는 것이 일상이라 어느 정도는 면역이 돼 있지만 사람인 이상 쉽지 않다. 제3자의 눈으로 흔들림 없이 판을 바라보는 일이다. '무심(無心)'으로 복기하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마음가짐만 가질 뿐이다."

―좌우명이 바로 '무심(無心)'이다. 무슨 뜻인가.

"사심 없이 두는 것. 굉장히 어려운 경지다. 이겨야겠다는 생각조차 하면 안 된다. 다만 최선을 다해 임하는 거다. 최선을 다해 평상심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천재'라는 세간의 평가를 여러번 부인했다.

"나뿐 아니라 '천재'라 불린 사람은 대개 '너 천재냐'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한다. 아마 스스로는 자기를 바보라고 생각할 거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천재'라는 호칭이 합당할 만큼 자신에게 만족을 못 하기 때문에 그렇다."

―앞으로 어떤 바둑을 두고 싶나.

"정상에서 내려오면 승부사로서는 끝난 거다. 내가 정상에 있다면 '앞으로 이러이러한 바둑을 두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바둑을 보급하고, 재주 있는 아이가 혹 있다면 한둘쯤 키우고 싶기도 하다."

조훈현은 "4세에 바둑을 시작해 다른 길을 모르니 방향을 틀 수도 없었다. 60이 넘은 지금도 가끔씩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생각하지만 그저 지나가는 꿈일 뿐이다" 라며 웃었다.

-당신에게 바둑이란 뭔가.

"인생의 길인 것 같다. 바둑을 통해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됐다. 내게 바둑은 길이다."

 

 

조선일보 B1면
3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