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인사들 운전기사에게 정보 요원들이 접근해 하는 작업은...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입력 2014.04.22 18:33 수정 2014.04.22 18:41

⊙ 운전기사들의 ‘下馬評’은 여전히 위력 떨치며 정보기관의 동향자료로 회자
⊙ “VIP가 그만두라고 하면 사표를 써야 하는 운명이니 노예나 다름없죠”
⊙ 대통령 공식의전 차량인 ‘대한민국 1호차’를 몰던 운전기사들… 아직도 인연 이어가
⊙ 집권 초, 박근혜 대통령은 로비스트의 운전기사와 訟事
⊙ 국회의원 차량, 과거 검은색 중형차 일색에서 MB의 카니발 이후 차종·색깔 다양해져

국회의사당 앞에 줄 지어선 국회의원들의 차량들.
1413년(태종13) 궁궐의 종묘와 대궐문, 지방의 감영(監營) 앞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 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고 적어놓았다. 말을 타고 온 방문자들에게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도록 한 것이다. 성현(聖賢)이나 고관(高官)의 탄생지나 무덤 앞에도 하마비를 세우곤 했다.

고급 관리들이 말에서 내려 궁궐이나 관청에 들어간 사이, 마부들은 하마비 앞에 모여 세상 풍문을 주고받았다. 자연 인사(人事) 얘기가 많았다. 이런 얘기를 일컬어 ‘하마평(下馬評)’이라고 부른다. 하마평은 궁궐의 출입이 잦은 고급 관료의 입이 발원지라는 점에서 무척 정확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VIP’의 수행비서, 그중에서도 운전기사들이 현대판 ‘마부들’이다. 지금도 베테랑 정보 담당자들은 정부서울청사나 삼청동 총리공관, 국회의원 회관의 운전기사 대기(휴게)실에 들러 글자 그대로 ‘하마평’을 수집한다. 기자와 만난 서울중앙지검 한 수사관의 말이다.

“정보의 맥(脈)을 아는 사람들은 힘들게 발품 팔아 관료들을 접촉하기보다 장차관급 운전기사(기능직 공무원)에게 먼저 접근하죠. 그들의 정보는 대개 정확합니다. 자신이 모시는 VIP가 근래 누구와 만나는지, 통화할 때 누구를 언급하는지, 심지어 청와대 수석 누구를 욕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죠. 그들은 성격 고약한 관료 차를 몰게 되면 낙담하고, 인품 좋은 관료는 서로 모시려 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어도 하마평은 여전히 위력을 떨치며 정보기관의 동향(動向)자료로 회자(膾炙)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기자는 정부기관 운전기사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과거 임명직 경남도지사를 역임한 윤한도(尹漢道) 전 의원(15·16대 국회의원)이 도지사 시절, 공무원 인사를 할 때 청사(廳舍) 내 기사 대기실에 들러 이들의 여론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었다. 정부기관 한 기사의 얘기다.

“윤 전 의원이 내무관료로 계실 때 기사들의 여론을 꼭 직접 챙겨 들었다고 해요. 단순 출장을 다녀와도 꼭 기사 대기실에 들러 볼펜 한 자루라도 전하곤 했는데, 그분 말씀이 ‘기사들의 밑바닥 정서가 올바른 것’이라고 했대요. 기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정책이나 인사에 반영하곤 했다는 겁니다. 그분 차를 운전했던 한 기사분이 전한 얘기입니다.”

실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VIP와 운전기사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이다. “VIP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도 곤란하고, 신뢰관계가 없어 서먹한 사이도 곤란하다”고 한다. 게다가 운전기사 사이의 여론을 공무원 인사나 정책에 반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여러 ‘눈’이 주시하기 때문이다.

운전기사의 밑바닥 정서를 듣다!

윤한도 전 의원은 경남도청 7급에서 시작해 32년 만에 임명직 도지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내무부 감사관과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를 거쳐 1993년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이내 옛 기억을 더듬었다.

“1971년인가 내무부로 발령 나기 몇 달 전, 부산시청 사무관으로 재직할 때였어요. 밥도 제때 못 먹고 밤 10시, 11시까지 야근하기 일쑤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밤늦게 귀가하면 그 시간에 배가 고파 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 숟가락 놓자마자 방바닥에 드러누워 자곤 했어요. 그래서인지 급성 십이지장궤양에 걸렸어요. 어느 날 도청 복도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하혈을 많이 했어요. 다른 분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도청 기사 한 분이 저를 끌어안고 관용차에 태워 대학병원에 데려갔고, 사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당시만 해도 관용차 좌석에 하얀 시트를 깔았습니다. 제가 그 시트를 피범벅으로 만들었으니….”
국회의원 시절, 윤한도 의원. 오른쪽은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윤한도 사무관은 건강이 회복되고 얼마 후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발령을 받고 상경했다. 당시 운전기사에 대한 고마움을 내내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운전기사를 동료라고 생각하고 대했어요. 1993년 3월 경남지사로 발령받고 귀향(歸鄕)했는데, 옛날 생각이 나서 기사 대기실에 들러 그들과 바둑을 두곤 했어요. 주위 사람들이 ‘도지사가 깜냥 없이 운전기사 쉬는 방에 가서 바둑이나 둔다’고 충고하는 이도 있었고, 비서실 직원들도 ‘지사님, 남들이 안 좋게 생각한다’고 말렸어요. 저는 상관 안 했어요. 기사실에 탁구채와 탁구대를 들여놓았는데 점심시간에 웃통 벗고 기사분들과 탁구를 많이 쳤어요. 그분들도 저를 좋아하고, 저도 친형님처럼 생각하고 그랬어요.”

공직에서 물러날 때 도청 운전기사들이 그에게 감사패를 전했다고도 했다.

“기사들이 글쎄, 글씨하고 문양을 순금으로 넣은 감사패를 만들어 줬어요. 저는 다른 기념품은 다 버려도 그건 꼭 간직합니다. 지금도 1년에 한두 번 경남도청에 들를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기사 대기실에 들러서….”

―탁구대가 지금도 있던가요?

“하하하. 챙겨보지 못했는데….”

―공무원 인사 때 운전기사 여론도 귀담아들었다던데요?

“도지사는 밑바닥 정서를 잘 모르거든요. 보좌하는 국장·과장도 있지만 제일 잘 아는 이가 기사들입니다. ‘이번에 누가 승진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대개 그분들 판단이 옳아요. 제가 슬쩍 (인사의) 운을 떼보면 스스럼없이 얘기하는데, 종합해 보면 다 정답이야. 하하하. 그래서 참고를 많이 했지요. 의도적으로 한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말이죠.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정당 공천도 상향식으로 한다는데, 밑바닥 민초의 얘기가 거의 맞는 얘기고, 옳은 얘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인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가 지금 서울 연희동에 사는데 떡볶이집 아줌마와 떠들고, 복덕방에 들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해요. 제가 누군지 모르는 주민들이 저를 ‘동네 반장’이라 불러요. 하하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주변”

VIP와 운전기사 사이에 이처럼 미담(美談)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대형 사건의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운전기사다. 몇 년 전 파이시티 로비 사건으로 최시중(崔時仲)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朴永俊)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의 발목을 잡은 것도 이들에게 돈을 준 브로커의 운전기사였다.

최근에는 연 매출이 수백억 원인 파고다어학원의 박경실 대표가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남편이자 창업주인 고인경 회장의 측근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고, 그 대가로 수억 원을 건넨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사건도 운전기사가 관련 사실을 경찰에 제보하면서 불거졌다. 그러나 박 대표 측은 “기사에게 돈 준 것은 맞지만 살인교사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시절, 공직자 인사검증을 맡았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박재홍 전 선임행정관은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조직 내 동료나 부하직원, 상사, 운전기사의 여론이 곧 자신의 얼굴이라는 얘기다. 그는 재임 당시 수천 명의 공직 후보자를 검증한 뒤 《공직의 길》이란 책을 펴냈다.

“인사철이 되면 음해성 제보나 소문이 빠질 수 없는데, 특히 고위직에 올라갈수록 경쟁이 치열하고 주변의 음해도 많이 생깁니다. 본인에 대한 소문과 평가는 본인을 가장 잘 아는 주변인에게서 대부분 나와요. 평소 주변을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는 “청와대에서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들여다봐야 할 때, 예를 들어 평상시 행동이나 사생활을 알고 싶으면 그 기관의 운전기사들에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운전기사들이 잘 얘기합니까? 입이 무거울 것 같은데….

“공식 루트를 통해 물어보면, 대개 솔직하게 얘기합니다. (VIP에게) 섭섭한 것이 있으면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죠. 수행비서나 운전기사들이 과묵하거나 입이 무겁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운전기사라는 일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정신적 피로도가 매우 높은 직업이잖아요. 이분들은 자신이 가깝게 보필했던 VIP들에게 기대치가 높게 마련인데 그에 상응하는 대접이나 배려를 받지 못하면 실망감이 배가(倍加)되기 마련이죠.”

그는 “고위 관료들이 전용차량을 운행할 때도 나름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공식행사에 차량을 이용하면 아무리 늦은 시각이라도 차량을 대기시킬 수 있지만 개인 약속이라면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여의치 않으면 약속장소까지만 운행케 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고 봐요.”

그는 “관용차나 운전기사는 개인 소유도, 자신의 비서도 아니다. 주말이나 휴일의 경우, 공식일정이 아니면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고위직 공직자일수록 보는 눈이 많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자연히 음해성 소문이 퍼질 가능성이 높지요. 한번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막기 어렵고 거의 사실처럼 굳어지기도 합니다. 공직자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위한 봉사자입니다. 가장 큰 장애물이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 ‘가장 가까운 주변’이 운전기사일지 모른다.

“10년 이상 모셨지만,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

10여 년간 전직 국회의장의 운전기사로 일했던 K씨를 만났다. 그는 현재 파트타임으로 외국인학교 스쿨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그는 한때의 ‘주군(主君)’을 ‘미물(微物)’로 표현했다. 이 거물 정치인의 대외 이미지와 내부에서의 평가와는 사뭇 달랐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의식적으로 그랬는지 보좌진과 식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지방에 내려갈 때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혼자 밥을 먹지 운전기사인 저랑은 같이 먹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는 “10년 이상 모셨지만,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K씨는 핸들을 잡기 전 개인사업을 하며 제법 큰돈을 만졌다. 그러나 1979년 2차 오일쇼크 여파로 부도를 맞고 말았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모아 빚은 갚았는데, 정작 받을 돈은 못 받았다”고 한다.

“시골 가서 가축을 키우다 다시 상경했지만 할 게 없었어요. 이홍구 전 총리가 신한국당 대표를 맡게 됐는데, 이 전 총리를 모셨던 한 친구가 운전을 권해서 1년간 그분을 모셨어요.”

당시 직함은 ‘당대표 특별보좌관 운전기사’. 이 전 총리가 정계를 떠나면서 전직 국회의장에게 자신을 소개시켜 주었다고 했다.

“제가 가기 전 운전기사를 2~3개월마다 갈아치웠어요. 6개월 이상 버틴 기사가 없었는데, 저는 10년을 했어요. 충신은 수행비서만 한 이가 없지요. 수행비서는 비위(非違) 사실을 다 알지요. 말을 안 할 뿐이지. 그래서 사건이 터지면 검찰에서 잡아가는 게 운전기사요, 수행비서입니다. 한나라당 시절, ‘차떼기 사건’이 터졌을 때 당 재정 담당 국회의원의 운전기사가 대검 중수부에 소환됐어요. 얼마나 혹독하게 조사받았는지 나중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리고, 이혼당하고 폐인이 됐다는 소문도 들렸어요.”

K씨가 나중 그 운전기사를 만났더니 뭔가에 쫓기는 사람마냥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고 한다.

“검찰 직원들이 기사들을 발톱의 때처럼도 안 여겼다고 해요.”

―보통 VIP를 기다릴 때 식사는 어떻게 하나요?

“알아서 먹지요. 어떤 VIP는 운전기사의 식사까지 챙겨주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분이 더 많아요. 사실 월급에 식대가 포함돼 있어요. 하지만 자기 때문에 먼 길을 달려온 사람이잖아요. 정몽준(鄭夢準) 의원도 옛날엔 (수행비서에게) 돈을 안 썼어요. 16대부터인가 자기 수행들에게 밥을 사 먹였어요. 그 후부터 덜 인색하다는 평가가 주변에서 돌기 시작했죠.”

그는 “운전기사 대개가 소화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다. “VIP 운전기사는 모시는 분의 스케줄 때문에 개인적인 일을 못 한다. 출퇴근에 대한 조급함과 압박감 때문에 잠을 잘 설친다”는 것이었다.

“VIP가 가야 할 행사가 있으면 그 시각에 맞춰야 하는데, 미리 출발해서 기다리게 해서도, 늦게 출발해 지각하게 해서도 안 되니 항상 긴장할 수밖에요. 차가 막히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신호위반을 자주 합니다.”

VIP를 수행하는 기사들은 남의 애경사(哀慶事)는 챙겨도 자신의 대소사는 못 챙기기 마련이다.

“VIP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밤낮과 휴일이 없어요. 명절 때 더 바쁘고요. 집안 행사가 있거나 친척 어르신이 돌아가셔도, 조카가 결혼을 해도 못 갑니다. 제 주위 사람 얘기를 들어봐도, 대놓고 무시당하는 운전기사가 많다고 해요. VIP가 그만두라고 하면 사표를 써야 하는 운명이니 노예나 다름없죠. 그런 점에서 돈과 인격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어요.”

“갈수록 국회의원 質 떨어져”

새누리당 비례대표 1번인 민병주 의원실의 정진석(鄭鎭石) 비서는 국회의원 운전기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1981년 4월 11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육사 16기 출신의 정순덕(鄭順德·11~14대 국회의원) 의원을 모시게 된 것이 무려 19대 국회까지 이어졌다. 햇수로 33년. 같이 핸들을 잡았던 기사들이 모두 여의도를 떠나도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롱런 중이다.

“제가 모시는 분을 5분 만에 잠들게 할 정도로 편안하게 운전하는 게 비결입니다. 그리고 안전이 제일 중요해요. 때로는 굼벵이같이 느리게 가는 우직함이 빠름을 이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핸들 앞에서 자신을 다스려야 하고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시간과 싸워야 한다.

“제가 모셨던 어느 국회의원은 워낙 성격이 급해 보통 계단을 2~3계단씩 뛰어 걸었어요. 그러니 늘 긴장 상태에 있어 밥알이 모래알 같았어요. 집에선 아이들이 잠잘 때 출근했다가 잠들 때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1년에 집에서 밥 먹은 경우가 세끼도 안 될 걸요? 지금은 휴대폰이라도 있지, 그때는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밖에서 대기해야 하니… 어린이날 아이 손잡고 놀러 간 기억이 없어요. 마음에 상처가 많이 남아 있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수행비서나 운전기사 중에 파탄 난 가정이 많아요. 어떤 국회의원은 우연히 신세 한탄을 하는 운전기사의 일기장을 보고, 기혼자를 기사로 채용하지 않는다고 해요. 주군 잘 만나면 대접받고, 못 만나면 고생하고 그렇지요.”

―11대부터 19대까지 국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겠네요.

“그렇죠. 과거엔 의원과 보좌진 사이에 의리가 있었고 자기 식솔처럼 챙기는 풍토가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요즘 의원들도 정치인이라기보다 ‘입법(立法)공무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벌은 과거보다 나아졌을지 몰라도 의원의 질은 더 떨어졌어요. 작년에 미래창조과학부와 관련된 법안이 하나도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어요. 공청회, 토론회 등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 법안 하나 만드는 데 20억원이 든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면 진짜….”

그는 “14대 국회까지만 해도 여야가 서로 싸우더라도 본회의장에 밀치고 들어오면 못 이기는 척, 법안을 통과시켜 줬는데 지금은 본회의장 앞에서 스크럼 짜고 집기 쌓아두고… 운동권 출신이 들어오니까 이런 발상이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검은색 중형차 중심이던 의원 차량도 다양해졌더라고요.

“그렇죠. 몇 년 전만 해도 검은색 에쿠스나 체어맨, 그랜저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카니발 승합차를 개조해 탄 뒤로 이재오, 김용태, 진수희 의원 같은 친이(親李) 그룹이 모두 카니발을 타면서 승합차 붐이 일었어요. 서울 근교나 충청권 의원들이 버스 전용 차선을 달릴 수 있는 승합차를 이용하면서 이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차종과 색깔이 다양해졌어요.”

‘대한민국 1호차는 서울1가 1001번’

과거 대통령 전용차량 번호는 ‘서울1가 1001’번이었다. 1002번은 국회의장, 1003번은 대법원장, 1004번은 없고, 1005번은 국무총리, 1006번은 여당 국회부의장, 1007번은 야당 국회부의장 번호였다. 1008번부터는 국회 상임위원장이 타는 관용차다. 16대 당시 국회교육위원장 차량을 몰았던 엄경식씨의 말이다.

“‘대한민국 1호차’인 대통령 전용차량을 모는 것은 모든 VIP 운전기사에게는 꿈이죠. 아무나 몰 수 없어요. 생사고락을 함께한 가신(家臣)이 대통령 전용차량을 몰았습니다. 그들은 대개 지금까지도 VIP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대한민국 1호차 운전기사’ 이야기를 직간접 들을 수 있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재임 시절, 대통령 공식의전 차량인 ‘84년형 캐딜락 리무진’을 몬 이는 김종기씨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1969년 군에 입대해 이등병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육군본부에서 노태우 중령의 운전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이후 금진호(노 전 대통령의 동서) 전 장관의 관용차를 운전하다 1981년 노 전 대통령이 대장으로 전역하자 다시 옛 상관을 모셨고 계속 인연이 이어졌다고 한다. 엄씨의 이야기다.

“김씨가 몬 84년형 캐딜락 리무진은 노 대통령이 퇴임하기 1년 전 외무부 의전과로 보내고 92년형 7인승 캐딜락 리무진을 새롭게 장만했는데 차체와 유리가 방탄은 기본이고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유리 칸막이가 있어 인터폰으로 통화해야 하는 차량이었어요. 이 캐딜락보다 1m 더 긴 벤츠도 있었습니다.”

김종기씨는 1993년 대통령 퇴임 이후 20년 이상 계속 연희동 사저에 머물며 운전하다 불과 1년 전에 그만뒀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서울대병원에 장기 입원해, 사저와 병원을 오가는 일이 잦고, 사저에서 숙직을 해야 하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쳤다고 한다.

작년 6월 노 전 대통령과 동생 재우씨 사이에 비자금을 둘러싼 송사가 벌어졌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김씨가 크게 낙담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전직 청와대 부속실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의 동생 재우씨 측이 노 전 대통령이 숨겨놓은 30억여 원가량의 비자금이 더 존재한다고 폭로했다. 소송이 계속 진행되니 (김씨) 고민이 많아 보였다. 끝까지 명예롭게 모시고 싶었지만 힘들어 결국 그만뒀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작년 7월 18일 자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 검찰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운전기사 명의 통장에 있던 자금 30억여 원을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보고 계좌추적을 하고 있는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현직 대통령이 운전기사 빈소에 가서 눈물 흘려

김종기씨 후임으로 ‘대한민국 1호차’를 운전한 이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운전기사였던 이충일씨다. 그는 암 투병 끝에 1997년 6월 사망했다. 현직 대통령 신분이던 YS가 모든 공식일정을 미루고 운전기사였던 고인의 빈소(서울대병원 영안실)를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당시 상도동에 자주 출입했던 한 운전기사의 말이다.

“고인과 YS의 인연은 거의 25년 이상 이어졌을 거예요. YS의 신민당 총재 시절인 1970년대 초 인연을 맺어 그의 손과 발이 됐던 것이죠.”

충남 서산 출신인 그는 신민당 의원이었던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의 차량을 몰다 1974년부터 신민당 총재의 운전기사가 됐다.

“빈소를 찾은 YS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어렵던 유신 시절, 고생을 많이 하고 이제 와 좀 살만해지니 세상을 떠났다.’”

이씨가 두 차례 위암수술을 받고도 살았는데, 끝내 버티지 못한 것은 아마도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게 주변의 추측이다.

“충일이 형이 결혼을 세 번 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도망을 갔고 두 번째 부인과는 이혼을 했어요. YS가 가택연금을 당할 때 운전기사 봉급을 줄 형편이 아니었어요. 또 그 시절, 하루 24시간 상도동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가정을 돌볼 수 있었겠어요. 어느 마누라가 그런 남편과 같이 살겠어요? 다 도망가지.”

이씨는 술을 좋아했는데 YS는 와인만 마셨다고 한다. 그걸 모르는 외부 인사가 YS에게 양주를 선물하면 양주는 으레 이씨 수중에 들어갔다. “양주 얻어먹는 맛에 운전했다”는 것이었다. 이 인사의 계속된 이야기다.

“한번은 비서 중 한 사람이 YS에게 ‘운전기사가 낮술 먹고 운전한다’고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YS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충일이 그노마는(그놈은) 한잔 묵어야(먹어야) 지 실력이 나온다, 아이가.’”

DJ가 운전기사를 각별하게 대한 까닭은?

고(故)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자신의 운전기사였던 김ㅇㅇ씨를 각별하게 대했다고 한다. 여기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1971년 4월 신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 후보에게 석패했던 DJ는 그해 5월 총선을 앞두고 영등포 지역 유세를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교통사고(지원유세 차량과 14t 대형트럭의 충돌)를 당했다.

DJ는 이 사고를 박정희 정권의 음모라고 자주 주장했었다.(《월간조선》 趙甲濟 전 대표는 관련자를 추적, ‘DJ가 타고 있던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우연한 사고’라고 결론 내렸다.)

이후 DJ는 지팡이를 짚고 보행을 해야 했으니 DJ나 이희호(李姬鎬) 여사에게 차량은 손발과 다름없었다. 김씨는 DJ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하던 1985년부터 차량을 몰았다.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의 추천으로 DJ 차를 몰았다는 설이 있지만, 전북 남원 출신의 김병오(金炳午) 전 의원(11·14대 국회의원)이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한 VIP 운전기사의 말이다.

“DJ 쪽이나 동교동계 출신은 100% 죄다 호남이지만 김씨는 충청도 출신이었어요. 원래는 김병오 의원의 차를 몰다가 김 의원이 낙선하는 바람에 자기 수행을 DJ에게 보낸 거예요. 어쨌든 야당 시절 DJ를 위해 대선과 총선 각 3번, 지방선거 2번 등을 치르며 100만km를 달렸다고 합니다.”

DJ는 당시 최고급 대형차였던 아카디아(대우차 제작)를 타다가 대선을 앞둔 1997년 5월 검은색 다이너스티 V6 3500으로 바꾸었다. DJ는 25만km를 뛴 아카디아 승용차를 김씨에게 주었지만 그는 “내가 쓰기에 너무 크다”며 당시 호남 출신 국회의원(尹鐵相)에게 250만원에 되팔았다고 한다.

김씨를 잘 안다는 전직 청와대 부속실 인사의 이야기다.

“DJ가 대선 후보 시절, 관훈토론회 같은 곳에서 항상 하는 얘기가 ‘박정희 정권의 테러로 사고를 당했다’입니다. 그런 정치적 의미가 있으니 이희호 여사도 운전기사를 각별하게 대했다는 겁니다. 한번은 김씨가 전직 대통령 전용차량 운전기사를 모두 불러 신촌 어디서 밥을 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영부인께서 더욱 파격적으로 대했다고 해요.”

‘파격 대우’란 청와대 특차계(대통령 경호팀만 관리하는 차량계) 계장을 의미한다. 보통 대통령 전용 1호차 운전기사는 청와대 5~6급직(職)에서 시작하는데 그는 3계단을 껑충 뛰어 3급을 달았다. 이게 문제가 되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시절에는 운전기사가 특차계장을 아예 맡지 못하도록 했다.

김씨는 청와대 근무 시절, 뒷돈을 챙겼다가 나중 체면을 구겼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씨는 대통령 의전차량을 운전하던 1999년 3월 중소기업 사장 K씨로부터 “P기업의 굴뚝청소 협력업체로 선정되도록 도와주겠다”고 속여 500만원을 받는 등 2003년 1월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3700만원을 받았다가 불구속 기소됐었다. 검찰조사 결과, 김씨는 P기업의 회장과 친한 국회의원에게 청탁했다가 거절당했지만 이 사실을 숨기고 계속 피해자를 속여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생도 많이 하고 성실한 분인데, 처음부터 직급을 좋게 받으니까 너무 오버를 한 것 같아요. 툭하면 민원 가져다가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해결해 달라고 하고, 안 되면 영부인에게 바로 얘기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 소문이 청와대와 국회에 많이 돌았어요.”

가장 믿을 만한 이에게 핸들 맡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전기사였던 선봉술씨는 노 전 대통령의 고향(경남 김해) 친구였다. 진영중학교 동창으로 알려졌다. 한때 두 사람의 관계는 동업자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친노(親盧) 국회의원의 차량을 몰았던 한 인사를 만났다.

“선씨는 노 전 대통령이 경영에 참여한 생수회사 대표를 맡은 적이 있어요. 또 대통령의 형 건평씨와 선씨가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의 한 필지를 공동소유한 적도 있고요. 단순한 운전기사를 넘어 동업자 내지 사업 파트너였던 셈이지요.”

1998년 11월 노 전 대통령이 운영했던 생수회사인 장수천의 대표로 선씨가 등재된 일도 있다. 이 인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선씨가 ‘친구가 대통령이 되니 주변에서 용돈으로 쓰라며 수백만 원씩 줬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대통령 친구라는 소문이 퍼지니까 이득을 보려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던 거죠. 결과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나 친노 입장만 난처해졌어요.”

고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이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14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전용 운전기사는 2명이었다. 직급은 과장급. 정 회장의 어린시절 꿈이 소학교 선생님이어서인지 자신이 다녔던 소학교 은사의 손자를 운전기사(박종각씨)로 썼다고 한다. 은사의 손자에게 운전을 맡겼다는 의미는 그만큼 운전기사를 신뢰했다는 의미다.

1992년 5월 박씨가 몰던 정 회장의 전용차가 그랜저에서 쏘나타로 바뀐 것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충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16대 국회 교육위원장 차량을 운행했던 엄경식씨의 말이다.

“정 회장은 검소한 이미지를 강조하셨는데 어느 날 추기경을 만나고 나서 ‘큰 차 안 타기 운동’을 소속 의원들에게 제안했어요. 의원들에게 ‘쏘나타 한 대씩을 줄 테니 차종을 바꾸라’는 권유도 하면서 말이죠.”

1992년 5월 15일 정 회장이 김 추기경을 면담했다. 그 자리에서 추기경은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는 뜻에서 승용차를 그랜저에서 쏘나타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쇼로 보일지 모르나 정 회장이 그렇게 한다면 그런 소리는 없을 것 아니냐”며 제안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추기경 뜻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친김에 국민당 의원들에게 쏘나타 한 대씩을 무상으로 주면서 타고 다닐 것을 권유키로 작정했다. 엄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의원들은 이왕 선심 쓰려면 쏘나타보다는 그랜저를 달라고 했어요. 지역구 활동을 위해 하루 수백km를 뛰어야 하는데 안전과 휴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죠.”

결국 정 회장은 2000cc급이 아닌, 2400cc급 쏘나타를 선물했다. 2400cc급 쏘나타는 당시 수출용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李相得) 전 의원의 차량을 40년 가까이 몰았던 이영희씨의 이름도 VIP 운전기사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한다. 이씨는 최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나이도 같은데다, 군대 동기로 알려졌으며 코오롱에서 같이 근무한 사이다. 코오롱 사장 출신의 이 전 의원이 1988년 민정당 간판으로 정계에 진출하자 그 역시 코오롱을 떠났다. 고인과 친했다는 전직 국회 운전기사 K씨의 말이다.

“보름 전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이 전 의원이 제일 먼저 찾아와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고인의 두 아들도 모두 코오롱에 근무하고 있어요. 이 전 의원이 구속되자 충격으로 병세가 더 나빠졌다고 해요. 평소 ‘영감(이상득)이 잘못한 게 아니라 밑에 있는 비서들이 잘못한 것’이라며 자책하기도 했고요.”

박근혜 대통령의 수행비서들

국회의원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차량을 운전한 이는 안봉근 현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비서관이었다. 그는 대구 달성군의 국회의원이었던 쌍용 김석원 회장의 비서로 처음 정치권에 입문했다고 한다. ‘쌍용 계열사 출신’이란 얘기도 들린다.

나중 안 비서관이 박근혜 의원의 일정을 책임지는 수행비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박모씨가 핸들을 쥐게 됐다. “박씨는 국회가 아니라 육영재단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동료 국회 운전기사들은 전한다. 국회 경력이 12년이나 되는 기사 P씨의 설명이다.

“대선을 얼마 앞두고 박씨에게 불미스런 일이 있어 실컷 고생만 하다가 그만뒀어요. 누가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다가 몇백만 원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대통령이 그런 것을 질색하니까 그만두게 됐고요.”

박씨는 전직 경찰관 등과 함께 지난 2010년 6월 건물 임대업자 전모씨의 건물 임대사업 관련 탈세 자료를 빼돌린 뒤 세무기관이나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전씨로부터 1억원을 빼앗은 혐의로 기소됐었다. 대개의 동료 기사들은 “괜찮은 친구였다”며 그를 동정했다.

P씨는 안 비서관에 대해 “답답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답답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고, VIP 얘기는 일절 안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하고 친해서 이런저런 부탁을 해도, 그 자리에서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거의 해결이 안 돼요. 그러곤 부탁한 사람을 두 번 다시 안 봅니다.”

또 다른 국회 운전기사는 안 비서관을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 그와 친하게 지냈던 K씨가 국회를 떠난 뒤 명절선물용 굴비장사를 시작했어요. 박근혜 의원실에다 좀 팔아보려고 안 비서관에게 굴비 샘플 몇 가지를 보냈는데, 마트에 직접 전화해서 가격을 비교해 보고 몇천 원 비싸다고 퇴짜를 놨다고 해요. K씨가 나중 전화를 걸었더니 ‘비싸서 딴 굴비세트를 샀다’는 겁니다. K씨가 ‘그럼 가격을 좀 깎아달라면 되지’ 하니까, ‘형님, 그 생각은 못 했다’고 말했답니다. 그 정도로 답답한 사람입니다.”

국회의원 시절, 박 대통령과 수행비서와의 관계에 대해 이런 얘기도 들렸다. P씨의 말이다.

“(수행비서와) 업무 중심이지 다른 얘기는 일절 안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냉정하다 싶을 정도예요. 오래 모시면 수행비서에게 자상한 면도 보여주는데, 그런 면이 없었나 봐요. 사적인 질문을 하면 ‘노 코멘트’로 대하고… 상당히 냉정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야당 대표 시절, 국회에서 밤샘 농성을 할 때 피곤하면 차에서 쉬는데, 그때도 편하게 쉬지 않고, 팔걸이 쪽에 엎드린다고 해요. 육영수 여사 머리 때문에 그런가 봐요.”

朴 대통령이 운전기사와 소송하다!

박근혜 정부 초기, 대통령과 운전기사 간 형사소송이 불거진 일이 있다. 부산저축은행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박태규(구속·징역 2년 6월과 추징금 8억원 선고)씨의 전 운전기사 김모씨와 박 대통령 간 소송이 그것이다.

박 대통령이 김씨를 고소한 것은 대선을 앞둔 2012년 5월. 김씨는 《한겨레21》과 인터넷 팟캐스트 ‘나꼼수’ 인터뷰를 통해 2010년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 기간에 로비스트 박씨가 부산저축은행 구명로비를 하려고 박 대통령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대선을 앞두고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박태규와 일면식도 없다”며 김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구속수감 중이던 박태규씨도 “운전기사 김씨가 지어낸 얘기”라며 부인했다. 이 송사는 대통령 취임 후에도 계속 진행됐다. 관례로 따지면,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선거 과정에서의 고소고발 소송은 보통 취하한다. 그러나 이 사건만은 그대로 진행했다. 박 대통령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작년 8월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이성용 판사는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해 김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김씨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월급 받는 운전사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박씨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는 대통령을 안 만났으면서 (박씨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허풍이 센 사람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소망교회 식구로 헬스클럽에 함께 다녔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부산저축은행 구명청탁과 함께 박씨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던 김두우 전 대통령실 홍보수석비서관(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을 구속시킨 것도 김씨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그의 한마디에 청와대 현직인사가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박태규씨와 함께 여성용 골프채 세트를 사서 김 수석의 사모님에게 전달했다. 김 수석에게도 중고 드라이버와 새 드라이버를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김 전 수석은 그러나 1심에서 징역형(1년 6월)을 받았지만 2012년 8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진술에 신빙성이 없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의적으로 피고인을 모함하려고 말을 꾸며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작년 4월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 판결했다.

모두 333일간 구금을 당해야 했던 김 전 수석에게 다행스런 소식이 들렸다. 서울고법 형사1부 황병하 부장판사는 지난 1월 14일 그에게 6550만여원을 형사보상토록 결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구금의 종류와 기간, 구금기간 중 입은 재산상의 손실과 정신적인 고통 등을 고려해 보상금액은 1일당 19만4400원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번 실추된 명예가 다시 회복될지는 의문이다.

“죽을 때까지 나를 모신다는데,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지만…”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두 명의 평생 동지가 있다. 운전기사로 처음 인연을 맺은 권중태(權重太·72) 보좌관은 지금까지 40년간 손과 발이 되고 있고, 김진용(金鎭勇·73) 한국이용사회중앙회 회장은 46년째 그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이 전 의장이 “신의도 의리도 없는 험악한 시대에 40여 년간 함께해 온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다. 인생의 반려자들”이라고 말할 정도다. 또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운전 잘하는 사람이고, 제일 머리 잘 깎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운다.

“나라가 잘되려면 믿음이 있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 존경받아야 해요. 비서나 운전기사가 하루아침에 배신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짓밟으니까 사고가 나는 것 아닙니까.”

권 보좌관이 이 전 의장과 연을 맺은 것은 1974년. 이 전 의장이 원외인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으로 재직할 때부터다.

“버스회사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쫓겨났어요. 제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 취직이 잘 안 됐어요. 당시 공화당에 인척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돈은 없지만 젊고 훌륭하신 분’이라며 소개시켜 주었어요.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어느 날이었는데 약속장소에 모셔다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추운데 차에서 기다리지 말고 몇 시쯤 나올 테니 다방 같은 데 가서 있다가 시간 되면 오라’고 하셨어요. 아시겠지만, 대개의 권위적인 정치인들은 아랫사람에게 그런 말을 안 해요.”

권 보좌관이 처음 운전한 차량은 이 전 의장이 중고(中古)로 구입했던 코로나 승용차. 이후 대우 레코드 승용차와 기아 포텐샤를 거쳐 지금은 구형(舊型) 현대 그랜저를 타고 있다.

“이른바 ‘요정정치’가 활개칠 때도 재벌인사와는 일절 안 만나셨어요. 저녁에 정치인과 어울려 술 마시면 불의와 타협할 수 있다며 약속을 안 잡으니 그런 면에서 편한 점도 있었어요. 자식 3명을 출가시키면서 청첩장 한번 돌린 일 없었습니다.”

그는 이 전 의장과 휴대폰을 같이 쓴다. 하루 일정을 서로 상의하고 약속장소에도 같이 간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밖에서 볼 땐 대쪽 같고 권력 앞에선 항상 직설적이셨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다정하고 가족처럼 대하셔요. 제가 식사를 못 해서 의장님 댁에서 식사를 하게 될 때면 한 식탁에서 같이 둘러앉는 것은 물론이며 주말에 가족과 외식할 때도 한 식당, 한 테이블에서 가족처럼 똑같이 대해 주셨어요.”

1967년부터 서울 광화문에서 ‘청화이발관’을 운영해 온 김진용 회장은 오랜 세월 이 전 의장의 머리를 매만졌다. 과거 청화이발관은 이발 의자를 28개나 두고 이발사와 면도사가 30명, 넓이가 100평에 달할 정도였다. 김 회장은 “그때 《경향신문》에서 동양 최대 규모라는 표현을 썼다”고 했다. 정치인과 저명인사, 관료들이 단골손님으로 젊은 시절 YS, DJ의 머리도 그가 손질했다.

“의장님 성격은 날카롭지만 머릿결이 아주 순하고 부드러워요. 그런데 머리카락이 너무 붙으면 모양이 안 나는 머리여서 드라이로 약간 살려서 세팅을 해야 합니다. 지금 헤어스타일을 수십 년 고수하고 계시지요.”

곁에 있던 이 전 의장이 “권력 앞에는 날카롭지만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순한데”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김 회장은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미용사를 관장하는 협회 회장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지만 이 전 의장을 위해 두 달마다 한 번씩 가위와 빗을 든다.

“한번은 제가 바빠서 가장 믿고 맡기는 이발사에게 의장님 머리를 부탁한 적이 있어요. 다 손질하고 나서 성에 안 차셨는지 다시 하라고 시켰어요. 속으로 ‘의장님 머리는 다른 이가 해선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이 전 의장은 “이 분들과 40여 년을 함께 살았다는 것이 기쁨이자 자랑이다. 죽을 때까지 나를 모신다는데,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지만…”이라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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