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최고의 선구안… "사람에 투자한다"

강동철 기자
입력 2019.08.14 03:10

[창업의 밑거름, 벤처투자자] [1]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는 한국 벤처투자 업계에서 최고의 선구안(選球眼)을 갖춘 인물로 꼽힌다. 2010년 초기 스타트업 투자·육성 전문 업체인 프라이머를 창립해 여행 서비스 업체 마이리얼트립, 패션 플랫폼 업체 스타일쉐어, 중고 상거래 서비스 번개장터 등에 투자했다. 모두 미래의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기업) 후보로 꼽히는 기업이다.

그는 사무실도 없는 예비 창업가에게 수천만원을 쥐여주고, 멘토링(창업지도)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찌 보면 무모할 만큼 도전적으로 투자하면서 투자 성공률을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난 권 대표는 "제품은커녕, 사무실조차 없는 상황에서 투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딱 하나, 사람"이라고 말했다.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가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자신이 투자한 기업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 대표는 “투자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사람”이라며 “여기에 고객과 시장이 받아들일 사업 모델을 갖춘 창업자에게 투자한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창업자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분야에 얼마나 몰입하는지, 그리고 여기에 자신만의 인사이트(통찰)가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이동건 마이리얼트립 대표와 대학생이었던 윤자영 스타일쉐어 대표는 창업에 대한 의지와 관심 분야에 대한 지식, 열정이 전문가보다 더 해박하고 뛰어났어요. 바로 투자를 결정했죠."

사업 모델보다 사람, 돈보다 멘토링

사람을 보고 난 다음, 사업 모델을 본다. 권 대표는 "지나치게 참신하거나 창의적인 사업 모델은 가능한 한 피하는 편"이라고 했다. "사업은 결국 현실에 뿌리내리기 때문에 상식에 맞아야 합니다. 고객과 시장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업 모델을 갖춘 창업자, 기업에 주로 투자합니다."

단순히 돈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프라이머는 기업들이 실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멘토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사업 아이디어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수정'을 권유한다. 모두사인, 세탁특공대, 호갱노노 등이 이런 사례다. 권 대표는 "이니시스 대표 시절부터 후배 창업자에게 여러 차례 조언을 했는데, 말을 잘 안 듣더라"며 "차라리 조언하기 위해 투자하자는 생각에 벤처 투자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프라이머에는 권 대표 외에 네이버 김상헌 전(前) 대표, 슈피겐코리아의 김대영 대표, 지란지교소프트의 오치영 대표 등 선배 창업자·경영인이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후배 창업자에게 사업 노하우도 알려주고, 필요한 인맥·수단 등을 발굴해준다.

이런 권 대표도 놓친 투자처가 있다. 중고 거래 서비스 '당근마켓'이다. 권 대표는 "당근마켓 김재현 대표가 처음 다른 회사로 창업했을 때부터 교류하면서 '기회가 되면 다음번에 꼭 투자하겠다'고 했었는데, 당근마켓 창업 때 아쉽게도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현재 당근마켓 김재현 대표는 프라이머의 파트너로 함께하고 있다.

창업 환경은 100점, 정책은 낙제점

그는 한국의 IT(정보기술) 창업 생태계를 가장 오랫동안 경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PC 통신 '천리안'의 엔지니어로 일하다 1998년 국내 최초 전자결제 서비스 업체인 이니시스를 창업했고, 이후 이니시스를 매각해 마련한 자금으로 프라이머를 세웠다. 이 회사는 현재까지 총 182개 스타트업에 약 135억원을 투자했다.

권 대표가 평가하는 한국 창업 생태계 수준은 어떨까. 그는 “창업 환경은 ‘이렇게 스타트업 하기 좋을 때가 없었다’고 할 만큼 나아졌지만,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후퇴했다”고 말했다. “타다 같은 경우를 보세요. 법의 사각지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합법인 서비스입니다. 이를 법을 만들어가면서 금지하는 것이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권 대표는 “이니시스의 전자결제 서비스도 첫 3~4년간은 ‘불법’이었다”고 했다. 당시 온라인 쇼핑몰에서 카드 결제를 하면 ‘이니시스’로 영수증이 찍혀 나갔는데, 이것이 ‘가맹점 명의 대여’라는 논란이 일었다. 유흥주점이 음식점으로 위장하고 영수증을 끊어주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이를 법으로 규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3년 이니시스 같은 온라인 결제 대행 서비스를 합법화했다. 과거엔 불법이었던 새로운 서비스를 법제화해 육성했다면, 지금은 합법인 서비스를 규제해 불법으로 만드는 상황인 셈이다. 권 대표는 “스타트업이 점점 기존 산업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 집단의 반발이 커지면서 규제가 계속 나오는데, 이런 상황을 계속 방치하면 기존 산업과 스타트업이 공멸(共滅)한 자리에 해외 기업이 들어와 시장을 잠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B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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