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추궁은 나중에… 원인 규명 앞세운 英 '그렌펠 참사' 보고서

파리=손진석 특파원
입력 2019.11.01 03:34

25개월 동안 증거 수집해 1000쪽짜리 1차 보고서 발표
주민은 조사委 배제, 유족 만남 최소화, 조사과정 공개
조사과정서 책임자 처벌 주장 안나오고 정치공방 없어

2017년 6월 14일, 아파트 전체가 화염에 뒤덮인 영국 런던 그렌펠 타워. /AFP 연합뉴스

2017년 6월 14일 72명의 목숨을 앗아간 런던의 공공 임대아파트인 그렌펠타워 화재 조사위원회가 지난 30일(현지 시각) 1000쪽에 달하는 1차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화재 발생 3개월 뒤 구성된 조사위는 2년 1개월간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보고서를 내놓았다.

항소법원 판사 출신 마틴 무어-빅(73) 조사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난 2년간 그날 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증거로 밝히는 데 초점을 뒀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철저하게 화재 원인과 방재 및 소방·구조 시스템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책임자 규명과 처벌 등 인적 책임은 1단계 조사에서는 우선순위에서 빠졌다. 2단계 조사까지 모두 완료된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사 과정에서 여야 정쟁이 벌어졌거나 책임자 처벌 요구가 분출하지도 않았다. 메이 당시 총리, 사디크 칸 런던 시장에 대한 사임 요구도 없었다. 유족들은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화재가 발생한 바로 이튿날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총리는 "공개적인 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곤 화재 발생 2주 뒤 28년 활동하고 은퇴한 판사 출신 무어-빅을 조사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증거 중심으로 조사를 책임질 적임자로 본 것이다.

무어-빅은 조사위 활동을 개시하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의문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건의 실체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사위에 그렌펠타워 주민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 공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유족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감정 개입을 막겠다는 의지 표시였다.

무어-빅은 도시 계획 분야에서 34년간 공무원으로 일한 베테랑을 조사위 사무총장으로 임명한 것을 비롯해 화재·건축·수사 등 각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29명의 조사위원을 임명했다. 이들은 2년간 105차례에 걸쳐 증언 청취, 현장 조사를 했다. 모든 조사 과정은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조사위는 4층의 한 가정에 있던 냉장고의 전기 결함이 발화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또 2016년 건물 외벽을 재단장할 때 설치한 가연성 알루미늄 피복재가 순식간에 타면서 30분 만에 옥상까지 불길이 번졌다고 했다. 런던 소방대가 화재 발생 직후 주민들에게 "집 안에 그대로 있으라(stay put)"고 해서 논란이 된 사안에 대해서도 결론을 내렸다. 이미 유독가스가 유입된 계단을 오르다 질식사할 위험이 있어서 집 안에서 기다리는 게 생존 확률이 더 높다는 소방대의 최초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해당 지시를 더 빨리 철회했으면 사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1단계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는 빌딩 규제의 허점과 소방관 훈련, 고층빌딩 대피 훈련 등 국가 가이드라인을 개선할 것을 포함해 46가지 권고 사항도 담았다. 철저히 원인 분석과 재발 방지에 역점을 둔 것이다.

조사 보고서가 나오자 생존자와 유가족으로 구성된 단체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성명을 내고 "오랫동안 결과를 기다려왔다. 진실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조사위를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그렌펠 유나이티드의 공식 입장과 별개로 일부 생존자는 "런던소방대 간부들을 해고하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모든 조사가 마무리돼야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가 이뤄질 것"이라며 거부했다.

조사위는 내년 초부터 다시 2년에 걸친 조사를 진행해 2022년쯤 공식적인 조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2단계 조사는 건물 설계상의 문제점과 왜 외벽에 가연성 소재를 사용하게 됐는지 등에 초점을 맞춘다. 또 그렌펠타워가 위험하다는 사전 경고가 왜 무시됐는지도 파헤칠 계획이다.

조사위가 실체를 파헤치는 동안 영국 정부는 비슷한 참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실행하는 데 집중했다. 영국에서는 2007년 높이 30m가 넘는 건물에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됐다. 하지만 이 규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았고, 1974년에 지어진 그렌펠타워에 스프링클러가 없어 피해가 컸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서둘러 낡은 고층 건물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보고서 발간에 맞춰 의회에서 1분간 묵념을 한 뒤 "정부가 가연성 소재 외벽 제거에 힘을 기울인 결과 공공건물에서는 사라졌지만 민간 건물에는 아직 남아 있다"며 "6억파운드(약 9000억원)를 들여 불에 타기 쉬운 외장재를 없애는 데 속도를 내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A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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