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트와이스가 놓은 韓日 가교도 허무나

김태훈 출판전문기자·논설위원
입력 2019.05.11 03:10

트와이스에 매료된 日 청년들, K팝 배우려 대한해협 건너와
과거사로 냉랭해진 韓·日 관계… 젊은이들 교류 본받아 풀어야

김태훈 출판전문기자·논설위원

K팝 걸 그룹 트와이스 소속 일본인 가수 사나가 "헤이세이(平成) 고마워, 레이와(令和) 잘 부탁해"라고 소셜미디어에 썼다가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전범 국가 출신으로, 한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군국주의 상징인 일본 연호 언급은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란 비난에 시달렸다. 사나는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퇴위로 연호가 바뀐 지난달 3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헤이세이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헤이세이 시대가 끝난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지만 헤이세이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라고 썼다. 이게 욕먹을 일인가.

일본 쪽 반응도 험악했다. "반일 근본주의 미치광이들" "나치와 같은 수준의 조선 파시즘" 같은 극언이 쏟아졌다. 과거사 문제에서 비롯된 반목이 양국에 드리운 음영이다. 한·일 두 나라엔 서로를 향한 공격을 애국이라 믿는 이들이 있다. 정작 하는 일은 양국 관계 훼손이다. 그들은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할 소재를 찾아 혐한(嫌韓)의 칼을 휘두르고 친일(親日)의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이게 한·일 관계의 전부는 아니다. 지금 두 나라 젊은이들은 대한해협을 넘나들며 뜨겁게 교류하고 있다. 트와이스는 방탄소년단(BTS)과 함께 일본 내 한류 붐을 이끄는 투톱이다. 지난 3월, K팝 걸 그룹으론 최초로 도쿄·오사카·나고야 돔 투어에 나섰다. 일본의 돔 공연은 좌석이 4만~5만석에 이르는 초대형 이벤트다. 그걸 다섯 번 해 전 석 매진을 기록했다. 트와이스가 최근 일본에서 발매한 한국어 앨범 FANCY(팬시)는 일본 오리콘 주간 차트 1위에 올랐다. 마돈나도 세 번밖에 못 한 이 부문 1위를 네 번이나 했다.

일본 청년들은 자국 출신 사나·미나·모모가 트와이스 멤버라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 K팝 아이돌이 펼치는 '칼 군무(群舞)'에 매료돼 "나도 한류 스타가 되겠다"며 대한해협을 건너온다. akb48 등 일본 현역 가수들까지 K팝 연습생이 되겠다며 한국 기획사 문을 두드릴 정도다. 작년 10월 한국에서, 그리고 올 2월 일본에서 데뷔한 아이즈원이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J팝이 한국 가요를 압도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 지금 두 나라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웹툰도 가세했다. 망가(일본 만화)의 나라에 진출한 한국 웹툰이 최근 6개월간 일본 만화 앱 1, 2위를 휩쓸었다.

한류 열풍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알려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1998)이 있다. 이 취지에 따라 한국은 일본 문화 개방을 단행했고 일본엔 한류 바람이 시작됐다. 그 후 일본에 출장 가면 어린이들까지 필자에게 다가와 "안녕하세요"라고 우리말로 인사했다. 가까워진 두 나라 관계를 실감하던 시절이었다. 그게 지금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양국에서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 탓이 크다.

3년 전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들었다가 중국인들에게 시달렸을 때, 한국에선 "중국의 촌스러운 민족주의"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랬던 우리가 이번에 사나를 공격했다. 다행히도 "개인적 감정까지 문제 삼는가" "우리도 혐한 세력과 비슷해지는 것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공감을 얻으며 사나를 향한 비난은 수그러들었다.

일본은 한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앞섰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일본을 앞지르는 분야가 나오고, 박수까지 받고 있다.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싸움 거는 반일(反日)로는 이룰 수 없는 진짜 극일(克日)이고 서로에게 도움 되는 윈윈(win-win)이다. 과거사 문제도 이런 정신으로 풀어야 한다.



조선일보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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