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12):한조해와 한동현(上)] 가난으로 약한첩 못써보고 동생 잃은 설움에 한의학을 공부하다

입력 2015.06.15 15:40 수정 2015.06.15 15:42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IC를 나와 자동차로 4분 거리에 충남 공주 한일고등학교가 있습니다. 학부모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학교입니다. 농어촌 일반계 고교지만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를 능가하는, 전국 최고로 꼽히는 학교입니다. 요즘 미국의 한 유명 사립고에 다니는 여학생이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에 동시 합격했다는 국제적인 거짓말을 해 진학 이야기를 꺼내기가 그렇지만 내신 석차 최하위인 9등급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이 학교에 전설처럼 전해지지요.
공주 한일고 교정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 고풍스런 멋이 느껴진다. 일부러 명문을 만들기위해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고한다.
학교의 위치는 척 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요람(搖籃)을 감싸는 산이 국수봉(國樹峰)인데 야트막한 아홉개 봉우리가 물결 치듯 펼쳐졌습니다. 풍수지리가 사이에서 이 땅은 예부터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明堂)으로 알려졌지요. 금 닭이 알을 품는 모양으로, 미래 지도자를 길러내는 학교 부지로는 최적이라는 것입니다. 닭이 금계가 되려면 주변에 ‘금(金)’자가 들어간 산이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바로 부근에 금동산(金童山)이란 산이 있네요. 맞은편은 어떤 모양일까요.

예로부터 명당은 진산(鎭山) 혹은 주산(主山)을 등에 지고 좌우로 좌청룡-우백호를 거느리며 앞으로는 책상 같은 안산(案山)이 있어야 하는데 여섯 봉우리가 파도처럼 넘실댑니다. 공교롭게도 이 골짜기의 이름이 ‘구작골(九爵谷)’입니다. 나라를 이끌어갈 아홉명의 정승을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내친김에 구작골에 얽힌 구전(口傳)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옛날 신선이 국수봉을 지나다 커다란 박 아홉개가 열린 형국에 감탄하며 넝쿨의 뿌리 되는 곳에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았답니다.
한조해선생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한일고 전경. 구작골이라는 말처럼 금계포란형의 명당터다.
지세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무덤이 있습니다. 상석(上石)도, 비석(碑石)도 없고 아무런 단장 없이 봉분(封墳)만 덩그러니 두 개가 보입니다. 유일한 치장이 무덤 좌우에 있는 연산홍 나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뭔가가 주렁주렁 걸려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학생들이 교복에 다는 이름표입니다. 어느 날 공부에 지친 한 학생이 자기 이름표를 무덤 옆 연산홍에 걸며 소원을 빌었답니다. 신통하게도 학생의 목표가 성취됐고 그 소문이 나면소 나뭇가지에 걸린 이름표가 해마다 늘었습니다.
연산홍꽃에 학생들의 이름표가 걸려있다. 그뒤로 설립자 한조해 선생의 묘가 보인다.
설립자 할아버지가 저 세상에서 자신들을 돕는다는 것을 학생들은 알고있다. 연산홍에 소원을 빌며 매달아놓은 이름표가 꼭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품 같다.
이 전통은 한일고 선배에서 후배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무덤 주인공의 손자가 지금 이 학교에 다니며 이름표를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무덤 옆 연산홍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1년 내내 반짝거리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앞에서 볼 때 왼쪽 무덤의 주인공은 한조해(韓祖海)선생입니다. 1913년 함남 정평군 봉양면에서 태어나 1997년 세상을 뜬 그는 한일고의 설립자입니다. 그 옆 오른쪽 무덤에는 2001년 남편의 뒤를 따른 홍종숙여사가 사이좋게 영면(永眠)하고 있습니다.
한조해 선생의 흉상이 공주 한일고 교정에 있다.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살펴보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한선생과 홍여사는 저승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터전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전국 최강의 학교가 된 한일고의 유래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장소를 서울로 옮겨봅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 뒤편 CJ본사 부근 남산 쪽 후암동은 비탈길입니다. CJ본사 맞은편에 허름한 4층 건물이 있는데 ‘한일한의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1953년부터 진료를 시작해 올해로 벌써 62년을 맞은 노포(老圃)라 하겠습니다. 이 건물은 1984년 개축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30년이 넘었으니 요즘 건물과 달리 추억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이곳이 한조해선생이 평생 환자를 돌보고 그렇게 돈을 번 돈을 알뜰히 모아서 한일고를 만드는 데 바친 터전이 되는 장소입니다.
후암동 비탈길에 있는 한일한의원. 공주 한일고의 모태다.
‘현제(玄濟)’라는 호를 쓰는 한선생은 부친 한남(韓南), 모친 윤남(尹南)의 2남1녀 중 장남입니다. 소작농의 장남은 자취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돌아가실 때 남긴 게 안경과 잉크병 등을 합해 작은 보따리 하나 정도였는데 그냥 버렸다고 하지요. 기록에 따르면 한선생은 젖꼭지를 다섯개 달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보지 못해 믿기 어렵지만, 가슴에 두 개, 등에 세 개가 있었다지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한선생의 부모님들이 근방에 사는 유명한 역술가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해석은 이랬습니다. “여러 사람 거둬 먹이라고 젖꼭지가 다섯개 달렸으니 걱정하지 말라.” 믿기힘듭니다만 이런 말이 실제 전해집니다. 하지만 한선생의 가정은 땅 한마지기 없어 여러 사람을 거둬 먹이기는 커녕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 가족의 유일한 희망은 천도교(天道敎)였습니다. 천도교는 동학(東學)을 뿌리로 한 것입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해 손병희 선생 대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 종교의 기본은 차별 없는 세상, 사람이 으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종교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지요. 한선생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것은 지금 어렵지만 미래에 잘 될 수 있다는 꿈을 주기에 족했습니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말, 참으로 희망적이지 않은가요.

한선생은 보통학교 졸업 후 함흥으로 가 영생(永生)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잇지 못하고 돈 버는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6세 어린 소년은 객지에서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가장 힘든 것은 부두의 하역(荷役)이었습니다. 몸에 상처 나는 것은 예사였고 바다에 빠진 적도 숱하게 많았습니다. 한때 일본인을 상대로 생선장사도 했는데,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한선생은 훗날 한일고 학생들에게 “오뎅(어묵의 일본식 발음)은 절대 먹지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고 합니다.
교훈이 벽에 걸려있는 한일고. 전국의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학교다.
이것은 자신이 장사하며 그 음식의 실체를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한선생은 한일고 학생들에게 “수박이나 참외를 먹지 말고 될수록 복숭아를 먹어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한의사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위장을 믿지 마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젊을 때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塊)같지만 함부로 쓰면 금세 망가지지요. 어린 학생들의 위장에 무슨 탈이 있겠습니까마는 한선생은 꼭꼭 씹어 음식을 섭취하는 법이며 손가락 셋만으로 엎드려 뻗쳐 하는 건강법도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20대에 들어 결혼하면서 사실상의 가장(家長)이 된 그에게는 불행이 쉼 없이 찾아왔습니다. 맨 먼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어이없이 사망한 것입니다. 동생이 몰던 트럭이 고장이 났는데 하필 건널목에 멈춰 섰습니다. 마침 기차가 다가오고 있었지요. 힘이 장사였던 동생은 있는 힘을 다해 겨우 트럭을 빼냈지만 늑막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동생을 잃자 한선생의 인생관은 달라졌습니다. 돈이 없어 동생을 죽게 했다는 한이 맺혀 한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거지요. 때마침 부친 한남옹도 한의학에 관심이 있어 집에 굴러다니던 책을 손에 잡게 된 것입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한선생은 밤에 한의학을 공부하고 낮엔 신의주에서 부산을 오가는 철도를 정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6ㆍ25가 터졌지요. <中편에계속>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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