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도록 하자"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9.11 03:00

[181] 인조반정 공신들의 밀약: 숭용산림(崇用山林)과 물실국혼(勿失國婚)
1623년 인조반정 공신들 '우리 재야 인사 등용' '왕비 또한 우리 문중' 권력 독점하자고 밀약
이를 위해 정적은 목숨 뺏고 권력 쟁취 위해서는 목숨도 내거는 조직적 실천
사대부 최고 영예인 성균관 좨주 24명 가운데 송시열, 송준길 문중 8명
인조~고종 왕비 20명 중 노론 가문 출신 17명
마지막 처족 민영휘는 1917년 '半島 제일 부호'

'세상에 전해 오기를 반정 초에 공신들이 모여 맹세할 때 두 가지 비밀스러운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왕실 혼인을 놓치지 말자[勿失國婚·물실국혼]'와 '재야 학자를 추천하여 장려하자[崇用山林·숭용산림]'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형세를 굳게 하여 명예와 실익을 거두려는 것이었다.(이건창, '당의통략', 1890년)

'반정'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을 뜻하고 공신들은 서인(西人)을 말한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망국까지 집권당은 서인이었고 서인 가운데 노론이었다. 그 초장기 독재의 비밀은 물실국혼과 숭용산림, 바로 '혼맥'과 '패거리'였다.

황산서원의 회동

1653년 윤7월 21일 서울에는 안개가 짙게 깔렸다. 효종은 아침 회의를 취소했다. 전날 밤 사발처럼 생긴 붉은 유성이 북극성을 스쳐갔다. 모든 일은 그 안개 자욱한 날 시작되었다.

그날 서인 거두 송시열은 충청도 연기에서 종일 뱃놀이를 즐기다 강경 황산서원에서 하루를 묵었다. 황산서원은 지금 논산 강경읍에 있고, 앞에는 금강이 흐른다. 그날 밤, 송시열이 동행한 윤선거에게 말했다. "윤휴(尹鑴)는 주자를 부정했다.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한다."

명분은 주자에 대한 해석이 해괴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였지만, 실질은 달랐다. 윤휴는 효종과 함께 군사력을 키워 북벌을 하자는 남인(南人)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을 도와달라는 효종에게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다스리라[先修己刑家]"며 북벌 포기를 권유한 반(反)북벌론자였다.(송자대전, '기축봉사(己丑封事)', 1649년) 윤휴가 이끄는 남인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결행하면 서인 권력은 갈 길이 없었다.

충남 논산 금강변에 있는 죽림서원. 이미지 크게보기
충남 논산 금강변에 있는 죽림서원. 원래는 황산서원이었다. 1653년 윤7월 서인 거두 송시열과 윤선거가 남인 당수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북벌을 주장했던 윤휴는 북벌 불가론자였던 송시열에게 눈엣가시 같았다. 송시열은 그 윤휴를 처단하기 위해 주자 성리학을 핑계로 윤선거에게 결별을 요구했다. 그날, 이 서원에서 훗날 노론으로 갈라진 순혈 서인들의 권력욕이 활활 타올랐다. /박종인 기자
송시열은 정책 대결 대신 이단(異端)이라는 틀을 씌워 윤휴를 제거할 뜻을 물은 것이다. 이에 온건파 윤선거가 "깊은 뜻은 알 수 없다"고 답하자 송시열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대가 윤휴보다 먼저 법을 받게 될 것이다."(송자대전 부록2, 연보)

동의를 받지 못한 송시열은 9월 9일 공주 동학사에서 "흑과 백 가운데 고르라"며 다시 윤선거를 몰아붙였다. 윤선거는 결국 "윤휴는 흑"이라고 항복하고 말았다. 1680년 결국 서인 세력은 '군사를 모아 반역을 꾸몄다'며 윤휴를 처형하고 권력을 잡았다. 윤휴는 "왜 조정이 선비를 죽이는가[朝廷奈何殺儒者云]"라 일갈하고 처형됐다.(이건창, '당의통략') 서인은 또 교조주의적 장년파와 합리적인 소장파로 분열돼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그 붕당과 다툼의 시작이 황산서원에서 벌어진 밤샘 토론이었다.

조직적인 권력 유지와 확대

처음부터 사림이 권력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인조반정 117년 전인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등극시킨 세력이 사림이었다. 개혁을 위해, 중종은 사림의 추천으로 과거 급제 후 3년 차 공무원인 조광조를 종2품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이 30대 대사헌은 모든 제도를 적폐로 몰아붙이며 뒤집어갔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을 29명만 남기고 없애버리고, 왕실 도교 제사 기관인 소격서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끝없는 개혁 요구에 중종은 조광조를 화순으로 유배 보내고 그곳에서 사약을 내렸다. 1519년이다.

서인은 선조 때 기축사화로 동인 세력을 절멸시키고 1623년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위에 앉히며 북인을 없애버린 뒤 탄탄한 집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순혈 정권이 된 서인이 그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맺은 밀약이 바로 '숭용산림'과 '물실국혼'이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원로 사림의 추천으로 고위직을 임명할 것이며, 왕비는 최대한 서인 문중에서 내도록 하자는 밀약이었다. 이후 세상은 참으로 그리되었다.

서인 세력은 '사방에서 유학자의 옷을 입은 자들이 모두 선생이나 제자를 칭하며 한꺼번에 나아갔다. 모두들 한데 모여들어 서로 따뜻하게 보살피고, 영광과 명성을 공경하고 사모해서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 죽더라도 피하지 않았다.' 당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목숨도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반면 '남인은 뒤를 봐 줄 외척 같은 세력이 없어 정권을 잡고도 10년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그 습속과 기질이 구속받기 싫어하고 빈틈이 많아 스스로 경계하는 일에 소홀해 많이 배척당했다.'(남하정, '동소만록', 1740년)

숭용산림과 '좨주(祭酒)'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과거로 임용되는 공무원 조직과 상관없는 '산림직(山林職)'을 신설했다. 재야의 '명망 있는 학자들' 추천으로 뽑는 자리이니, 이 자리는 자기들이 산림이라 인정한 자들만 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해 5월 성균관에 종4품 사업(司業)이라는 관직이 신설됐다. 1646년에는 세자 교육직에 당상관인 찬선(贊善)과 종5품 익선(翊善), 종7품 자의(諮議)가 설치됐다. 그리고 1658년 효종 때 마침내 '좨주(祭酒)'라는 정3품 관직이 성균관에 신설됐다. 좨주는 산림을 위한 최고 영예직이었다. 산림에서는 성균관 최고직인 대사성보다 좨주를 높게 쳐줬다.

중종 때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전남 화순의 조광조 유허비.이미지 크게보기
중종 때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전남 화순의 조광조 유허비. 송시열이 썼다. 오른쪽은 숙종 때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정읍에 있는 송시열 유허비. '(남인의) 독 묻은 손을 뻗쳤다'고 적혀 있다.
고종 때까지 산림직에 임명된 '별정직 특별 고위공무원'은 좨주 24명, 사업 21명, 찬선 28명, 진선(익선) 33명, 자의 35명으로 모두 141명이었다.(정구선, '조선후기 천거제와 산림의 정계 진출')

누가 임명됐는가. 맨 처음 좨주에 임명된 사람은 송준길이었다. 두 번째 좨주는 송준길의 동학이자 거물 중의 거물 송시열이었다. 역대 좨주 24명 가운데 정조 때 좨주 송덕상과 송환기, 순조 때 송치규는 모두 송시열의 후손이었다. 헌종 때 송계간과 철종 때 송래희는 송준길의 후손이었다. 고종 17년인 1880년 8월 28일 임명된 마지막 좨주 송병선은 송시열의 9세손이었다.(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집계) 마음만 먹으면,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拗執朝權·요집조권]' 보스와 정계 파벌의 연결 수단이었다. 이렇듯 서인과 노론의 권력 장악은 끈질기고 강력했다.

극단으로 몰고 간 정쟁

모두 죽였다. 북벌을 주장하는 윤휴를 주자를 욕한다고 덮어씌워 죽였고, 송시열이 미워한 이경석을 변호했다고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세상에서 그를 절연시켜버렸다.〈2019년 7월 17일자 '땅의 역사' 참조〉 정치판은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남인의 정책에 동조했던 윤선거는 송시열을 '시비를 가리면 되지 왜 피아를 구분하는가[只說是非而已 何用彼此爲哉]'라고 비난했다.(윤선거, '노서유고', '송시열에게 보냄')

대신 서인은 조직적으로 자기편을 철저하게 비호했다. 논리는 없었다. 자기편이니까 비호했다. 남인이 축출된 경신대출척 사건이 벌어졌을 때, 송시열은 남인 잔당을 박멸하려는 공작정치를 방관하고 지지했다. 이에 반발한 소장파 서인이 소론으로 갈라져 나갔다. 드디어 서인 가운데 순혈 중의 순혈 노론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다 숙종 때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던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당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를 남인은 놓칠 수가 없었다. 1689년 장희빈을 등에 업은 남인 정권은 송시열을 불러올려 정읍에서 그를 죽여 버렸다. 정읍에 있는 '우암 송선생 수명 유허비'에는 '흉악한 무리들이 독 묻은 손을 뻗쳤다[群兇先逞毒手·군흉선령독수]'라고 적혀 있다.

그가 죽고 7년 뒤 노론은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배향하겠다고 발표했다. 남인들은 "뭇 악을 갖춘 자[衆惡俱備·중악구비]"라고 극렬하게 반대했다.(1696년 1월 10일 '숙종실록') 그러나 조직적인 노론에게 남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그네 같은 남인 정권은 길어야 10년이었다.'(남하정, '동소만록')

"절대로 왕비만은 우리가."

인조반정을 주동한 서인들이 맺은 두 번째 밀약은 '물실국혼(勿失國婚)'이었다. 부마가 됐든 왕비가 됐든 왕실 혼인은 서인이 놓치지 말자는 밀약이다.

정치력과 완력은 즉자적이다. 하지만 이리저리 혼맥으로 왕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놓으면 그만이었다.

남하정은 '물실국혼'의 효용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무 때나 궁궐에 출입하며 궁내 움직임을 엿보고 치밀하게 모의해 은총을 굳게 할 수 있다. 요직을 담당하고 주상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이게 권력을 놓치지 않은 방법이었다.' '호화스러운 수레와 기름진 말과 부귀'는 덤이었다.

추존 왕(사후에 왕으로 규정된 왕족)을 포함해 인조부터 고종까지 조선 왕비는 계비를 포함해 모두 20명이었다. 이 가운데 숙종의 계비 경주 김씨 인원왕후, 경종비 청송 심씨 단의왕후, 추존 왕인 진종비 풍양 조씨를 제외한 17명이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임민혁,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글항아리, p90)

숙종 때 계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는 고종 때 또 한번 왕비를 배출해 물실국혼의 대미를 장식했다.(김명숙, '여흥 민씨 가승기략을 통해 본 17~18세기 여흥 민문의 형성과 가문 정비') 노론은 숙종과 영·정조, 순조 이후 세도정치를 거치며 크고 작은 부침(浮沈) 속에서도 왕비만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았다.

숭용산림과 물실국혼의 최후

두 밀계의 최후 수혜자는 여흥 민씨 고종 왕비의 친척 민영휘다. 그는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낙인찍혀 동학혁명 때 농민들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 1894년 그 동학 농민군 토벌을 위해 청나라 장수 원세개에게 직접 청나라 군사를 요청했고, 이후 실정(失政)으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오뚝이처럼 부활했다. 1907년 12월 20일 '대한매일신보'는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민영휘와 조병갑의 탐학이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민영휘를 '망국대부(亡國大夫)'라 불렀다.(1909년 4월 18일자) 민영휘는 1910년 병합 직전 합병을 공개 지지했다. 병합 후에는 일본 황실로부터 조선 귀족 자작 작위와 은사금 5만원을 받았다. 1917년 '반도시론'이라는 잡지는 그를 '총재산 5, 6백만원인 반도 유일의 부호'라고 보도했다.(오미일, '관료에서 기업가로-20세기 전반 민영휘 일가의 기업투자와 자본축적') 이게 '숭용산림'과 '물실국혼' 패거리를 역사가 감시하지 못한 결과다.


조선일보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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