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잘가라, 나의 드라이기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입력 2019.09.11 03:02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오늘 아침 헤어드라이어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렁찬 소리로 나의 아침을 깨웠건만 어디선가 진한 탄내가 슬슬 풍기길래 이상하다 싶었다. 얼른 전원 버튼을 끄는 순간 바람이 나오는 입구에서 불똥이 튀었다. 들여다보니 철사처럼 돌돌 말려진 부품이 시커멓게 타 있다. 심폐 소생을 하듯 다급하게 전원 버튼을 몇 번이고 다시 눌렀지만, 회생 불가능.

꼬박 7년 넘게 매일 아침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던 녀석이었다. 달콤한 잠의 한 자락을 떨쳐내고 회사라는 전쟁터로 나가기 위한 몸부림을 묵묵히 지켜봐 주던 녀석의 죽음 앞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렇게 보낼 수가 없었다. 수리센터에 보내볼까 싶어 얼른 앞뒤로 녀석의 몸을 샅샅이 살폈지만 7년의 세월 동안 제조 회사와 녀석의 제품명은 내 손끝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흔치 않은 티파니 블루 색깔에 날씬한 몸매를 뽐내던 녀석. 무엇보다 내 작은 손 크기에 딱 들어맞는 크기는 어떻고. 아, 이런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녀석 위로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2016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 영화 '룸'에서 주인공 잭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엄마와 함께 감금된 1평 남짓 작은 방에 있는 모든 물건들에 인사를 건넨다. 안녕 화분아, 안녕 의자야. 열일곱 살에 납치범에게 끌려온 조이는 납치범의 아이 잭까지 낳게 되고 7년 동안 갇혀 있다. 잭에게 그 작은 '룸'은 세상의 전부,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친구다. 조이는 잭을 탈출시키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모자는 구조된다. 영화의 마지막, 깊은 트라우마를 견뎌내는 중인 조이가 아들 잭과 그 끔찍한 공간을 다시 찾는다. 잭은 친구였던 물건들에 작별 인사를 건넨다. 조이는 아들 잭의 모습을 보고 삶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헤어드라이어를 담은 쇼핑백을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차마 던져 넣지 못하고 서 있다가 쇼핑백에 담긴 채로 내려놓고 돌아섰다. 말 못하는 물건이지만 친구만큼이나 마음이 갈 때가 있다. 그동안 수고했다.


조선일보 A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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