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쓰기만 할 거니? 난 가지고 논다

채민기 기자
입력 2019.09.11 03:00

국립한글박물관 '형태의 전환'展… 한글 소재로 한 디자인 유희의 場
자모의 모양 빌려온 가구부터 테트리스처럼 표현한 의상까지

국립한글박물관에서 9일 개막한 전시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은 한글을 소재로 펼치는 디자인 유희의 장(場)이다. 유희란 노는 것. 시각·제품·패션 분야 디자이너 22팀의 작품은 우리가 비로소 한글을 '가지고 노는' 경지에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글은 무조건 아름답다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워진 상상력이 한글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경쾌하게 펼쳐보인다. 한글이라서 아름다운 게 아니다. 한글이 아름답다.

곽철안의 '입방획'. 붓으로 한글을 쓸 때 미세하게 변하는 획의 폭이나 속도감을 입체로 표현했다. /국립한글박물관
한글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는 데 주목한 작품이 많다.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 양장점(양희재·장수영)의 '네모꼴 안에서의 한글 닿자들'이 대표적. 자음 하나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예컨대 같은 서체라도 '가'와 '닭'의 ㄱ은 모양이 다르다. 이처럼 다른 자모와 만나는 방식에 따라 최대 620여개까지 변모하는 ㄱ부터 ㅎ까지의 자음을 각각 겹쳐 잔상처럼 표현했다. 추상화나 착시 작품을 보는 듯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매일 글씨 쓰고 키보드를 치면서도 지나쳤던 한글의 조합 원리를 생각해보게 된다.

서정화 '자음과 모음의 조합' 중 글자 '오'를 닮은 조명. 생활 도구로 쓸 수 있도록 자음·모음의 비례나 간격을 조절했다. /국립한글박물관
박환성은 한글을 테트리스화(化)했다. '서울'이라는 단어에 쓰인 자모를 각각 테트리스 블록 형태로 변환하고 각 블록이 결합된 모양을 후드티셔츠에 넣었다. 역시 모듈(단위 요소)의 조합이라는 원리에 주목한 작품. 언뜻 봐선 한글이 모티브임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당장 입고 나간다 해도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다.

한글의 다채로운 형태미를 부각한 작품들도 있다. '자음과 모음의 거실'(박길종)은 한글 자모를 탁자, 의자, 옷걸이 등 가구의 구조로 활용했다. 기하학적이고 간결한 선이 특징. 반대로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김지만)는 한글을 화려한 그라피티(낙서 그림)로 재해석했다. 휘갈겨 쓴 듯한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가 화려한 의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전시장엔 이게 한글 맞나 싶은 작품도 있다. 초성·중성·종성이 결합하는 양상을 그래픽으로 시각화한 작품은 꽤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느 한글 전시회처럼 한글을 직접적으로 차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기처럼 익숙한 한글이 새롭다. 내년 2월 2일까지.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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