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그 시절 우린 이 바삭함에 황홀했네

송혜진 기자
입력 2019.09.10 03:00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돈가스

9남매의 가운데였던 엄마는 아홉 살 터울 나는 막내 이모를 바쁜 외할머니 대신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어린 이모가 흙투성이가 돼서 들어오면 옷을 빨아줬고, 누런 콧물을 흘리고 다니면 수돗가로 끌고 가 팍팍 씻겼다고 했다. 엄마가 키워낸 첫 아이는 어쩌면 큰딸인 내가 아니라 막내 이모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막내 이모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됐을 때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언니에게 젤 먼저 보여주고 싶은데, 집에 데려와도 돼?"라면서. 엄마는 선뜻 답을 못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뭘 해주지?" 밥 얘기였다.

이모부 될 사람이 온다 했던 문제의 그날, 엄마는 아침부터 비좁은 부엌에서 분주했다. 돼지고기 등심을 망치로 힘껏 두들겨 납작하게 편 다음 후추와 소금을 뿌려 재웠고, 밀달빵(밀가루·달걀물·빵가루) 순서대로 고기에 묻혀 바짝 튀겨냈다. 돈가스였다.

끓는 기름에 잠긴 고기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익어갔고, 엄마는 잠자코 옆에서 인스턴트 가루를 넣은 수프와 소스를 끓였다. 케첩·마요네즈를 얹은 양배추 샐러드, 삶은 마카로니와 통조림 콩, 반으로 잘라낸 귤…. 접시에 이런 것들을 올리고 돈가스를 얹을 때까지 어린 나는 반쯤 입을 벌리고 지켜봤더랬다. 이윽고 도착한 막내 이모와 남자친구는 "아니, 뭘 이리 대단하게 차렸어?"라고 했던가. 엄마는 잠자코 미소만 지었던가. 이후로도 난 종종 그날의 돈가스를 '따끔따끔' 떠올린다. 돌아보면 촌스럽고 민망하지만 그때 우리에겐 대단했던 음식. 우산 올린 파르페, 소개팅서 먹은 볼로네제 스파게티, 친구 집에서 첨 맛본 오므라이스 같은 것 말이다.

손예진·소지섭이 출연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도 두 주인공은 첫 데이트에 돈가스를 먹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맘에 아빠 정장까지 걸치고 경양식집에 여자를 데려가 돈가스를 썬다. 서먹하고 어색한 칼질, 목을 죄는 어색한 나비넥타이. 그래도 돈가스를 먹으며 두 사람은 결국 한 뼘 더 가까워진다. 왜 하필 돈가스였을까 싶지만, 돌아보니 또 알 것도 같았다. 그땐 돈가스여야만 했던 거다.


조선일보 A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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