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 문화 부활하나… 의자가 사라진다

입력 2019.09.07 03:00

[아무튼, 주말]
서서 먹고 마시고 스탠딩 매장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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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서울 을지로 3가 스탠딩바 ‘전기’ ② 서울 약수시장 ‘리사르 커피’ ③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소시지 스탠딩 바’.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롯데백화점
서울 약수시장 '리사르 커피'에는 좌석이 없다. 손님들은 ㄴ자형 바(bar)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신다. 서울에서 가장 트렌디한 동네가 된 을지로에서도 가장 트렌디한 술집 중 하나로 이름난 '스탠딩바 전기'는 테이블과 의자가 없다. 매장을 가득 채운 ㄷ자형 바에 기대서서 술 마시고 안주를 먹는다. 성수동 카페 '모멘토 브루어스'에서 앉아 마시고 싶은 손님들은 매장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우유배달통을 알아서 가져다가 구석에 놓고 앉는다. 날씨가 좋으면 커피를 들고 매장 바깥으로 나가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마시는 이도 많다. 롯데백화점은 본점 지하에 48가지 소시지를 서서 먹는 '스탠딩 소시지 바'를 지난달 6일 오픈했다.

'선술집' '목로주점'의 귀환?

매장에서 의자가 사라지고 있다. 서서 먹고 마시는 술집, 카페, 식당이 늘어난다. 커피 프랜차이즈 '투썸플레이스'는 최근 이태원에 에스프레소 특화 매장인 'TSP737'을 내면서 서서 마실 수 있는 '에스프레소 스탠드'를 만들었다. 신사동 내추럴와인 바 '디태치먼트'는 주방이 보이는 바에 서서 마셔야만 와인을 잔으로 마실 수 있다. 테이블에 앉으려면 와인을 병으로 주문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술집이나 카페에서는 서서 마시는 게 오히려 보편적이다. 음식평론가 강지영씨는 "영국인 남편(언론인 앤드루 새먼)과 그의 친구들은 펍(pub)에 빈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는다"고 했다. 가까운 일본에도 '다치구이(立ち食い·서서 먹기)' '다치노미(立ち飮み·서서 마시기)'라는 표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서서 먹고 마시기를 즐긴다.

우리나라에도 서서 먹고 마시는 문화가 없지는 않았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씨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선술집과 목로주점이 명동과 충무로, 을지로, 종로 일대에 꽤 많았다"고 했다. 선술집은 요즘 값싼 대중적 술집 정도로 인식되지만 정확하게는 서서 마시는 술집을 말한다. 목로주점에서 목로(木壚)란 술잔을 놓기 위한 좁고 긴 널빤지, 그러니까 바(bar)의 우리식 표현이다. '술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선술집이 사라진 건 1980년대 이후로 본다. 선술집과 목로주점의 장점은 서서 마시는 불편함 대신 값싸게 먹는다는 점인데, 1980년대 본격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주당(酒黨)들의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서 제대로 앉아 마실 수 있는 술집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즐기려고 서서 마신다

서울 마포 '연남서식당(연남서서갈비)'과 지방 시장통 술집 몇몇을 빼면 찾기 힘들었던 서서 먹고 마시는 문화는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다. 몇 년 전 이태원 경리단길 초입에 '스탠딩커피'가 문 열더니 올 들어 눈에 띄게 확산되는 중이다.

옛날 선술집처럼 값싸게 배를 채우고 취하기 위한 곳들은 아니다. '나폴리 정통 커피'를 지향하는 리사르 커피 이민섭 대표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제대로 맛볼 수 있도록 바 형태로 매장을 꾸몄다"고 했다. "에스프레소는 뽑아서 바로 마셔야 그 풍부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즉석식품'입니다. 바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뽑자마자 바로 팔을 뻗어 손님에게 드릴 수 있어요. 이탈리아에서 대부분 커피점이 바 형태인 건 그래서죠."

전기를 운영하는 김현기 대표는 "서서 마신다는 건 가볍게 즐긴다는 것"이라며 "퇴근하고 귀가하기 전 한두 잔 마시는 산뜻한 음주문화가 일상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탠딩바(standing bar)를 오픈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호주 멜버른의 유명 '마켓레인 커피'를 소개하기 위해 모멘토 브루어스를 지난 2월 문 연 노성원 대표는 "손님들과 직원들이 쉽게 섞이면서 소통할 수 있도록 일종의 '스탠딩 파티' 같은 공간을 원했다"고 했다.

‘리사르 커피’의 여름 메뉴 ‘카페 그라니타’.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저렴한 가격과 빠른 회전율이라는 서서 먹고 마시기 본연의 장점도 물론 살아 있다. 리사르 커피에서는 에스프레소 한 잔이 1500원, 카푸치노 2000원 등 모든 메뉴가 2500원 이하다. 이민섭 대표는 "이탈리아 평균 에스프레소 가격인 1.2유로(약 1600원) 수준에서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기에서는 생맥주 4500원, 하이볼 7000~8000원 등 주류를 저렴하게 판다. 안주류도 1~2명이 먹기 알맞도록 양을 줄이긴 했지만 '함바그 스테이크'가 1만1000원, '포테토사라다' 7500원, '양고기 볼로네제 파스타' 1만4000원 등 대부분 2만원을 넘지 않는다. 롯데백화점 스탠딩 소시지 바에서 가장 비싼 음식(핫도그)은 3500원이다. 서빙 인원을 줄이고 매장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 가능한 가격이다.

가성비·편리성 갖추면 더 확산될 듯

서서 먹고 마시는 문화가 외국처럼 보편화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강지영씨와 박찬일씨는 "좌식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현기 대표는 "요즘은 알고 오시는 분이 늘어 덜하지만, 지난 5월 오픈 뒤 한 달 동안은 들어온 손님 열 명 중 일곱이 의자가 없는 걸 보고는 바로 나가더라"고 했다. 노성원 대표는 "모르고 오시는 분들은 매장 안을 둘러보고 바로 나간다"고 했다.

가능성이 보이기는 한다. 롯데백화점 스탠딩 소시지 바에서 만난 회사원 이형민(33)씨는 "중고교 때부터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서서 먹어서인지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롯데백화점 F&B팀 임형빈 치프바이어(Chief Buyer)는 "(본점이 있는 명동·을지로·소공동 일대는) 시간에 쫓기는 회사원이 많은 상권이라 기다리지 않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스탠딩 바를 기획했는데 예상보다 매출이 잘 나오고 반응도 좋다"며 "5일까지로 예정했던 소시지 바를 오는 24일까지로 연장하고 27일부터는 참치 초밥·회를 서서 먹는 '스탠딩 참치 바'를 운영하기로 했다"고 했다.

서서 먹고 마시는 걸 새로운 경험으로 여기거나, 뛰어난 가성비에 만족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리사르 커피 단골 이정훈(22)씨는 "서서 마시는 게 재미있다며 일부러 찾아와 커피 마시는 제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이민섭 대표는 "중장년 손님들은 '적은 양을 싸게 마실 수 있다'며 젊은 손님들보다 훨씬 좋아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B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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