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차관님, 1조만 주시면 해결됩니다"

이진석 사회정책부 차장
입력 2019.09.05 03:13

요즘 공무원들, 1조원은 '껌값'
경제 살아나야 세금 걷히는데 세금 걷어 경제 살린다는 정부
금과옥조 '재정건전성' 찬밥 돼

이진석 사회정책부 차장

어느 부처 차관이 저녁 자리에서 "요즘 공무원들 배포가 어느 정도인 줄 아느냐"면서 꺼낸 얘기다. "얼마 전 업무 보고를 하던 직원이 '차관님, 1조원만 주시면 이 문제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더라"고 했다. 분위기 부드럽게 만들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담이라서 놀랐다고 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한테 매일 1000만원씩 준다고 쳐. 그렇게 해서 1조원을 주려면 몇 년이 걸리는 줄 알아. 대충 270년이야. 얼마나 큰돈인지 이제 감(感)이 좀 오나."

세금 퍼부어서 성장도, 일자리도, 복지도 다 하겠다는 정부가 3년째로 접어드니 요즘 공무원들의 스케일이 이렇게 커졌다. 입이 딱 벌어질 일이다. 서민들은 불경기에 지갑 열기가 겁이 나는데, 공무원들은 몇 조원쯤은 우습게 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난 2년간 일자리 만든다고 50조원 넘게 허공에 뿌렸다. 내년 일자리 예산은 사상 최대인 25조원에 달한다. 노인, 아동 연금과 수당 등이 늘어나고 새로 만들어졌다.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새로운 성장법을 시험한다면서 최저임금 덜컥 올려놓고 영세 기업, 소상공인들이 "월급 올려줄 돈 없다"고 하자 두말없이 세금 3조원을 풀었던 정부다.

경기 살린다고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해주고 박력 있게 추진키로 한 사업이 24조원에 달하지만 그 효과가 의문이라는 지적이 꼬리를 문다. 4조7000억원짜리 남부 내륙 철도의 경우 "노선이 지나가는 지자체 인구 다 합쳐봐야 10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뒷말이 나온다. 서울 송파구 인구가 60만명이 넘는다. 이렇게 세금 퍼붓는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1조원은 '껌값'인 줄 알게 된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내년 예산안은 역대 최대인 513조원짜리인데 적자 국채를 60조원 찍어내겠다고 했다. 9개월째 뒷걸음질하는 수출, 얼어붙은 내수 등으로 기업 실적이 뚝뚝 떨어지면서 몇 년 이어지던 세금 풍년이 끝나고 내년에는 10년 만에 세수가 줄어든다고 하니 빚내서 세금 퍼붓겠다고 한다. 다음 정부가 빚더미에 치이든, 빚 방석에 올라앉든 이 정부 임기 중에는 해마다 '초(超)수퍼 예산안'을 내놓겠다고 한다.

지난달 말 내년도 예산안 발표 직후 보건복지부에서는 "드디어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복지국가'가 됐다"는 말이 나왔다. 내년도 복지부 관할 예산이 82조원을 넘는데 교육부 예산은 72조원 정도라 복지 예산이 교육 예산을 앞서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연금, 저런 지원금 등 한번 주기로 정해놓으면 해마다 불어나는 일만 남은 현금성 복지를 늘려놓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올해 740조원인 국가 채무가 2023년에는 1000조원을 넘어선다.

나라 살림의 제1 원칙이고 금과옥조(金科玉條)였던 '재정건전성'은 뒷전으로 밀렸다. 규제를 풀어서 기업이 춤추게 만들면 세금을 덜 풀어도 될 텐데 이 정부는 "그런 일은 기대하지 마시라"고 한다. 두 가지 사업 중에 어느 쪽을 지원해야 더 효율적일지 따지던 재무 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두 사업에 모두 세금 퍼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혈세(血稅)라고 부르고 세금 아껴쓰는 것이 정부와 공무원의 도리였던 시절과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지나치다. 1조원쯤은 별것 아닌 세금 잔치가 벌어지면서 곳간은 비어간다. 이러다 나라가 주저앉는다. 엊그제 한 공무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화가 난 일반인이 쇠파이프로 유리창과 집기를 때려 부수는 식이었는데, 문재인 정부는 철거 전문 인부가 함마로 벽을 무너뜨리는 중이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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