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도 사람도, 익어봐야 아는 겨… 충청 할매들의 '손맛'

송혜진 기자
입력 2019.09.03 03:00

예순·일흔 넘어 뒤늦게 한글 배운 충청도 할매 51人 글 모은 책 출간
요리 비법이 主, 인생 이야기는 덤

"몸으로 알고 나이로 아는 거지… 인생도, 요리도… 전부 感이여!"

"대가리가 큰 대파는 까기는 편한디 맛이 읎어. 다듬기 귀찮아도 째깐하고 잔잔한 놈이 좋아. 남들이 힘들다는 자잘자잘 쪽파만 골라서 까구 담갔지. 매울 땐 쪽파를 하나 입에 물고 까믄 눈물도 안 나와. 손주가 아홉이여. 석 단, 넉 단씩 담가서 다 나눠줘. 다같이 이놈을 밥숟갈에 처억 걸쳐 먹을 생각하면 손 좀 가도 안 힘들어. 힘들면 좀 어뗘? 참말로 잘 먹는걸?"

조남예(72) 할매의 말을 옆에서 듣던 주미자(78), 박영자(70) 할매가 "암, 그런겨" 하며 맞장구를 친다. 나이 칠순·팔순을 넘긴 충청도 할매 51명의 요리 비결을 담은 책 '요리는 감이여'(창비교육)를 펴냈다. 충청남도 교육청 평생교육원이 뒤늦게 한글을 배운 이들의 요리법을 모았고, 봉사자·사서들이 할머니 입담을 들으며 중간 단계의 요리 과정을 채록했다.

고속버스 타고 서울 광화문까지 올라온 세 명의 충청 할매.이미지 크게보기
고속버스 타고 서울 광화문까지 올라온 세 명의 충청 할매. "힘들게 모셔서 죄송하다"는 말에 세 할매는 "덕분에 청계천에 발도 담가 봤어. 괜찮여!"라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어 보였다. 식혜를 들고 온 주미자(왼쪽) 할매, 쪽파 김치를 싸온 조남예(가운데) 할매, 도토리묵을 해온 박영자(오른쪽) 할매. 이들은 자신들이 펴낸 책에 꾹꾹 한글로 이렇게 적어 줬다. '인생도 감이여. 요리도 감이여. 사는게 다 감이여.' /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51명 중 세 명의 할매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조남예 할매는 쪽파김치를, 주미자 할매는 식혜를, 박영자 할매는 도토리묵을 직접 들고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우리 같은 사람이 신문사에서 인타뷰를 다 해보고, 인생은 살아봐야 아는 거여!" 누군가 이렇게 외치자 나머지 두 할매가 또 "암, 암!" 했다.

◇인생도 요리도 感이여

충남 천안에서 온 주미자 할매는 평생 절에서 살았다. 일본서 태어나 세 살에 한국에 왔고, 육이오 때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다. 형제자매도 없는 천덕꾸러기를 받아준 곳이 절이었다. 주지 스님 따라 동서남북을 오가며 이곳저곳에서 절밥을 해주며 살았다. "아침 세 시면 일어나서 왼종일 밥을 하는 겨. 밤 아홉 시까지 앉아 보질 못혀. 초파일이라도 되면 1500명씩 신도들이 몰려오는데, 그럼 다같이 또 밥하는 거지. 물어보고 배우고 책 보고 배우고 그럴 시간이 어딨어. 그냥 한겨. 하다 보니 안겨. 몸으로 알고 나이로 아는겨. 요리란 게 그런 겨."

식혜는 40년 넘게 만들었다. 찹쌀을 꼬도박(고두밥)으로 쪄서 엿질금(엿기름)을 쳐댄 다음 전기밥통에 두고 24시간 넘게 삭힌다. "그래야 밥알이 동동 뜨는 겨." 대추씨를 빼고 대추를 다다다 다져 잣이랑 넣고 휘휘 저으면 그만. "달면 못써. 적당해야 하는겨." 그가 플라스틱 페트병에 넣고 꽁꽁 얼려온 식혜는 그의 말처럼 은근하게 달고도 개운했다.

충남 홍성에서 올라온 박영자 할매는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자주 아파 학교를 많이 빠진 탓에 한글을 늦게 배웠다고 했다. "그림을 원래 좋아했어. 제대로 못 배워 한이었는데, 인자 글씨를 배웠으니 그림 그리믄 옆에 하고픈 말도 실컷 써넣을 수 있잖여? 글케 속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어." 도토리묵은 도토리 가루를 밥사발 하나만큼 넣고 물은 다섯과 반쯤을 넣고 묽은가 된가를 봐가면서 끓여서 만든다. 소금, 기름, 통깨, 흑임자를 도토리물이 엉길 때 같이 넣으면 더 좋다. 다 되면 뚜껑을 엎어 10분 정도 뜸을 들이고 판에 부어서 10~12시간쯤 굳힌다. "요새 누가 힘들게 집에서 햐, 안 그랴? 그래두 자식들 좋아하니까 하는 거여. 그거면 된 거여."

◇시간이 약이여. 모든 게 그려

조남예 할매는 육이오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교를 못 다녔다. 못 배운 게 죄가 아니지만 그래도 주눅 들었다. 버스를 타도, 테레비를 봐도 글자만 나오면 괜스레 간이 작아졌다. 뒤늦게 한글을 배운 요즘 그는 살 것 같다. 너무 좋아 눈물이 찔끔찔끔 난다. 할매는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오고, 결국 시간이 약이여"라고 했다. "살면서 까딱하면 숨 넘어갈 것 같은 날이 한둘이었게. 그래도 다 지나가. 김치는 둬야 익는 거고, 사는 건 지나봐야 아는 겨. 다 그런 겨."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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