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사모펀드는 죄가 없다

김태근 경제부 차장
입력 2019.09.03 03:15

외환 위기 후 사모펀드 國産化… 15년 만에 토종펀드 세계 수준
펀드 취지 악용한 조국 일가… 애써 일궈놓은 제도에 먹칠

김태근 경제부 차장
사모(私募)펀드라는 이름이 국내에 알려진 건 20년 전 외환 위기 직후였다. 론스타·칼라일·뉴브리지캐피털 등 이름도 생소한 해외 사모펀드가 대한민국 경제 발전과 수십 년 고락(苦樂)을 함께한 은행들을 집어삼켰다. 사모펀드는 부실해진 은행 직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하고 피땀 흘려 장만한 은행 자산도 팔아치웠다. 부실을 정리한다는 이유였지만 생살까지 도려낸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해외 사모펀드가 헐값에 인수한 은행들(옛 외환, 한미, 제일은행)은 이후 비싼 값에 되팔렸지만 예전의 영화(榮華)를 되찾지 못했다. "무자비한 구조조정으로 기업 정신마저 훼손됐기 때문"이라는 게 은행에서 일했던 사람들 얘기다. 외국 자본이 우리 기업을 난도질해 조(兆) 단위 이익을 챙기는 모습에 국민은 분개했다. 언론과 시민단체는 외국계 사모펀드를 '먹튀'라 부르며 혐오했다.

2004년 정부가 국내에 사모펀드 영업을 허용한 것은 자본시장을 더 이상 외국계의 놀이터로 방치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인 조치였다. 문재인 정부의 화법을 빌리자면 사모펀드도 이때부터 '국산화(國産化)'가 시작됐다. 부실기업이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을 사들여 구조조정하는 민간 주도 사모펀드(경영참여형 사모펀드)의 도입 취지는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우리 경제에도 절실했다.

토종 사모펀드 육성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도 이어져 성과를 냈다. 외국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형 펀드들이 등장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국내 사모펀드는 612곳, 규모는 75조원이 넘는다. 3000억원이 넘는 사모펀드가 58개, 그중에 10곳은 조(兆) 단위가 넘는다. 사모펀드만 운용하는 전문회사도 178곳인데 아시아 1위인 MBK파트너스를 비롯해 한앤컴퍼니, IMM 등 강자(强者)들이 즐비하다. 아픈 상처를 성장의 계기로 삼은 토종 사모펀드는 21세기 한국 경제의 드문 성공 사례다.

그런 토종 사모펀드의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하고 있다. 요즘 국민은 사모펀드 하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그 가족들을 먼저 떠올린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 경험이 많은 지인들조차 "정부가 어떻게 이런 제도를 허용할 수 있느냐"며 분노한다. 조국 가족들이 가입한 100억원짜리 사모펀드 하나가 75조원 넘는 바닷물을 흐려놓았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실이 드러나는 추문은 가족들의 단순한 출자금 위반 의혹에서 내부 정보 이용, 편법 우회 상장, 명의 도용 등 중범죄 혐의로 번지고 있다. 좋은 취지의 법규정을 어디까지 축재(蓄財)에 악용할 수 있는지, 조국의 일가친척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보여줬다.

하지만 사모펀드는 죄가 없다. 항상 그렇듯 문제는 법을 악용하는 소수(少數)의 일탈이다. 사모펀드 입법에 관여한 전직 고위 관료는 조국 일가 사모펀드에 대해 "투자자 구성도, 운영 방식도, 운영 주체도 입법 취지와 전혀 안 맞는다"고 했다.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 대표는 "(조국 일가 사모펀드는) 겉만 펀드지 실질은 주가 조작 세력"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 정권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결국 10년 넘게 외국계와 맞서 성장한 토종 사모펀드들만 '부자들 특혜 펀드'라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썼다. 하긴 조국 일가 덕에 외국어고등학교는 대학 부정 입시의 경연장이 됐고, 사립학교 소유자는 재산 빼먹는 범죄자로 의심받는 처지가 됐다. 법제도를 수호한다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제 잘못 없다고 우기느라 멀쩡한 사회제도의 신뢰까지 갉아먹고 있다.


조선일보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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