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정치] 안보도 여론조사로 정하나

홍영림 여론조사전문기자
입력 2019.08.26 03:15
홍영림 여론조사전문기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와 관련해 지난 22일 청와대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국민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거의 매일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며 "국민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종료 쪽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려울 때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원칙대로 결정했다"고 했다.

청와대 측 설명을 듣다보면 지난달 말에 파문이 일었던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의 '총선 전략 보고서'가 떠오른다. 보고서에선 "일본에 대해 원칙적 대응을 선호하는 여론에 비춰볼 때 (한·일 갈등은) 총선에 영향이 긍정적일 것"이라고 했다. 지소미아 파기(破棄)도 "한국당 지지층만 제외하고 모든 계층에서 찬성이 높게 나타난다"며 당파적으로 접근했다. 민주연구원 보고서처럼 8월 초까지 공개된 여론조사에선 지소미아 파기 찬성이 우세했다.

하지만 광복절을 맞아 지상파 방송들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달랐다. KBS·한국리서치 조사는 지소미아 재연장 찬성(40%)과 반대(44%)가 오차범위 내에서 비슷했다. 사실상 찬반(贊反) 차이가 없다는 의미다. SBS·칸타코리아 조사에선 오히려 '안보 차원에서 지소미아 유지'(56%)가 '맞대응 차원에서 파기'(37%)보다 훨씬 높았다. 이 조사에선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긍정 여론이 75%에 달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일본에 대한 국민 감정은 좋지 않지만 안보와 관련한 사안에선 합리적이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는 "여론조사를 해봤다"며 지소미아 파기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진짜 민심을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청와대는 지소미아 같은 국가 중대사를 어느 조사 회사가 어떤 방식으로 조사했는지 소상히 밝혀야 한다. 8월 들어 각 언론이 발표한 여섯 개 여론조사에서 지소미아 파기 찬성은 37%에서 62%까지 들쭉날쭉했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지소미아 파기를 '국민의 자존감'으로 해석한 근거가 무엇인지 국민은 상세하게 알 권리가 있다.

정부가 공론조사 형식을 빌린 여론조사로 밀어붙인 '탈원전'은 후유증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동북아 안보 질서에 파장을 미치고 명분과 실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소미아도 '감정'이 개입될 수 있는 여론조사에 맡길 수 없다는 우려가 높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여론조사를 거의 매일 실시할 정성의 절반이라도 외교·안보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책 방향을 정하는 데에 쏟았어야 했다"고 한다. 더구나 정권의 입맛에 맞는 '맞춤형' 결과를 내놓는 얼치기 여론조사에 의존했다면 국정(國政)은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A34면
헬스조선 상례서비스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