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윤전기를 세워라"

이동훈 논설위원
입력 2019.08.24 03:16
신문사에서 "윤전기를 세워라"는 말보다 더한 긴박감과 다급함의 표현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밤에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고 대형 사고가 돌발하면 신문사는 윤전기를 세우고 다시 신문을 만든다. 그 순간 신문사 전체가 전쟁터가 된다. 신문을 소재로 한 영화에선 극적 효과를 노려 윤전기를 세우는 장면을 종종 등장시킨다. 영화 '모비딕'에선 현장 기자가 두 번이나 윤전기를 멈춰 세운다. 미국 영화 '페이퍼'에도 살인사건 진실을 전해들은 기자가 말리는 선배와 난투 끝에 빨간 버튼을 누르는 장면이 나온다.

▶윤전기를 세우는 건 자동차 브레이크 밟듯 쉽게 할 일은 아니다. 이미 만든 지면이 날아가고 인쇄를 멈춘 만큼 신문은 늦게 나온다. 시간이 너무 초과되면 배달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밤 윤전기를 세우는 일은 조간신문의 숙명이다. 지난해 미·북 회담 추진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심야 트위터 변덕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여러 차례 윤전기를 세워야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011년 심야에 날아든 빈 라덴 사살 소식에 윤전기를 세우고 신문을 다시 찍은 일을 지면에 따로 소개한 적도 있다. 

▶세계에서 윤전기를 가장 쉽게 세우는 신문은 북한 노동신문이란 얘기도 있다. 오탈자만 발견돼도 윤전기를 세운다고 한다. 최고 존엄 관련 기사의 오자는 가혹한 처벌로 이어진다니 그럴 만도 하다. 윤전기를 세우는 일이 언론 탄압의 상징일 때도 있었다. 4·19 때 특무대 장교가 한 신문사를 찾아와 권총을 들이대고 윤전기를 세우라고 협박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조선일보도 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윤전기를 세우고 신문 전량을 압수해 간 일이 있었다.

▶전날 청와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관련 결정 발표를 예고한 시각은 저녁 6시 20분. 발표 11분 전에 춘추관장이 먼저 내려와 "윤전기는 세우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대형 사건이 있다는 예고였다. 지소미아 연장을 당연시 여기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파기' 쪽으로 상황이 급반전했음을 직감했다. 춘추관 전체가 술렁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몇몇 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 조간신문은 밤 9시가 넘어야 윤전기가 돌아가며 신문을 찍어낸다. 오후 6시는 윤전기가 시동도 걸지 않았을 때다. 사정을 잘 몰라서 한 말이겠지만 '윤전기를 세워라'에서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관련 뉴스로 도배된 다음 날 지면을 '지소미아 파기'로 갈아끼우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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