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고기를 단정하게 튀긴 옛날식 돈가스… 기억 속 그리운 돈가스를 뛰어넘는 맛이네

정동현
입력 2019.08.24 03:00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돈가스집편
서울 화곡동 '화곡손돈까스'

‘화곡손돈까스’의 철판치즈돈가스(앞)와 옛날돈가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돈가스보다 더 나은 음식은 없었다. 어머니가 기름을 아끼려고 얇게 기름을 두르고 지지듯 구운 냉동 돈가스도 좋았다. 케첩을 발라 도시락에 담아 놓은 돈가스는 점심시간쯤 되면 온기를 잃고 눅눅해졌다.

일부러 라면을 불려 먹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그런 돈가스의 맛도 즐겼다. 질척거리는 튀김옷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눅눅한 돈가스와 함께 식은 밥을 씹었다. 그런 날이면 친구들이 혹시 뺏어 먹을까 도시락을 책상 안쪽 깊숙이 밀어 넣고 고개를 숙인 채 턱을 움직였다.

가끔 동네 경양식집에 가서 하얀 수프에 깍두기를 곁들여 먹던 돈가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식이었다. 가장 흔하게 먹던 외식 음식 돈가스는 요즘 들어 많이 달라졌다. 고기를 두껍게 잘라 보슬보슬한 빵가루를 묻히고 일정한 온도에서 튀겨 속이 살짝 핑크빛 도는 촉촉한 수준이 아니면 줄을 세우지 못한다. 수행하듯 돈가스 하나하나 천천히 심혈을 기울인다. 그만큼 사람들은 오래 기다리고 전보다 높은 값을 치른다.

음식이 발전하고 시장이 커진다는 측면에서 이런 변화는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긴 줄 없이, 혹은 요리사의 엄숙한 표정 없이,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리듯 가벼운 마음으로 돈가스를 먹고 싶은 날이 있다.

부산 초량동 '스완양분식'은 그 옛날식 돈가스를 그대로 손님에게 내는 곳이다. 이제 어깨가 넓고 머리가 희끗한 주인장 대신 그만큼 덩치가 좋은 아들이 물려받아 돈가스를 튀긴다. 일제시대 해안을 매립해 만든 좌천동 매축지(埋築地)에 있던 오래된 건물에서 부산역 근처 번듯한 곳으로 자리도 옮겼다. 사람도 가고 장소는 바뀌었으나 맛은 변하지 않았다. 소고기를 써서 돼지고기에 비해 진한 풍미가 나는 비프가스, 케첩을 섞어 밥을 볶은 뒤 달걀 지단을 두른 오므라이스는 '소박한 외식'이라는 목적을 쉽게 달성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가스를 빼놓으면 이 집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아쉽지 않은 두께의 돼지고기에 도톨도톨한 빵가루 튀김옷을 두르고 중탕으로 데워 놓은 소스를 뿌려 상에 올리면 넓은 아버지 등을 바라보며 걷던 옛 시절이 그대로 밀려온다. 달고 시큼한 소스가 촉촉이 깃든 돈가스를 격자 무늬로 잘라 동행과 나눠 먹으면 배가 부른 것은 둘째, 마음의 어딘가가 잔잔히 차오른다.

서울로 올라오면 아현역 부근 경양식집 '테라스'가 가볼 만하다. 말씨가 고운 주인장이 내놓는 멕시칸샐러드 같은 안주와 찌르르한 생맥주 궁합도, 마카로니와 단무지, 시금치가 한 접시에 담긴 돈가스 솜씨도 조용히 묻힐 만한 수준이 아니다.

여기서 조금 멀리 강서구 화곡동까지 가면 15평도 안 돼 보이는 '화곡손돈까스'가 있다. 젊은 부부가 주방을 책임지는 이곳은 화려하지도 번잡하지도 않다. 주인장의 성격인 듯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정리된 실내는 알뜰한 신혼집 살림 같다. 손님들은 익숙한 이웃처럼 조용히 반찬과 수프를 셀프로 가져다 먹는다.

메뉴를 보면 갈비 양념에 고기를 재워 튀긴 갈비돈가스, 철판에 치즈와 소스·돈가스를 올려 함께 낸 철판치즈돈가스 등이 먼저 눈에 띈다. 달콤 짭짜름한 갈비 양념과 죽죽 늘어나는 치즈는 쉬워 보이는 조합이지만 평범하거나 구태의연하지 않다.

주인장이 권한 대로 치즈 돈가스를 샐러드, 빵과 함께 먹으면 다정한 집들이에 온 듯한 기분까지 든다. 얇게 저민 고기에 튀김옷을 단정히 입혀 튀긴 옛날식 돈가스는 과거의 노스탤지어를 뛰어넘는 맛이 있다. 튀김옷과 고기의 완벽한 일체, 과하지도 옅지도 않은 소스의 부드러운 어울림, 바삭하게 똑 떨어지는 식감은 조지 소로의 월든(Walden) 속 삶처럼 자연스럽고 자족한, 담담한 일상을 닮았다. 꾸미지 않아도, 소리쳐 주장하지 않아도 귀중한 우리네 하루를 닮은 돈가스 한 장이다.
조선일보 B7면
헬스조선 상례서비스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