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멋진 남자 유혹도 뿌리쳤는데… 남편은 사는 게 지루하다며…

입력 2019.08.24 03:00

[아무튼, 주말-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 안병현
지루함과 외로움. 그 둘을 맞바꿀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사는 게 지루하다면, 곁의 사람에게 말해보세요. 너의 외로움을 내게 주고 이 지루함을 가져가 달라고. 거짓 지루함, 값싼 외로움을 핑계로 배우자에게 상처 주지 말고…. / 홍여사

자정 넘어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은 침대로 직행해 곯아떨어져 버렸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치우다가 그의 휴대폰을 주워들었죠. 그런데 그 순간, 휴대폰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비유법이 아니라 진짜로, 전화기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지며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거실로 나와 그 수상한 전화기를 열어보았습니다. 한 달 전쯤, 둘째 녀석이 그랬습니다. 알고 보니 아빠랑 자기랑 같은 패턴을 쓰고 있었다고요. 제 손은 액정 위를 저절로 미끄러져 아들의 了자 패턴을 그렸습니다.

배우자의 폰을 훔쳐보고 있다는 죄책감은 1분도 채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동료와 회식을 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거든요. 그는 동료가 아닌, 친구들 서넛과 술을 먹고 왔습니다. 그 사실을 제게 감춘 이유는 단 하나.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제게 약속했던 한 여자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녀는 제 남편의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이었습니다. 대략 오륙 년 전쯤 일 때문에 알게 된 사이라는데, 금방 죽이 맞아 서로 오라버니, 동생이라 부르며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술자리를 만드는 그런 사이가 되었던가 봅니다. 저한테는 그녀의 존재가 비밀이었지만, 삼 년 전 어느 날 우연히 들통나고 말았죠. 동창들과 술을 마셨다던 그날도 남편은 곯아떨어져 있었죠. 그런데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에 전화벨이 울리지 않겠어요. 받아보니 여자였습니다. 오라버니 어디 있냐고. 제 남편을 애타게 찾더군요. 저는 태연한 척, 대답했습니다. 저, ○○씨 와이픈데요… 거기까지 말하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톡 끊었습니다. 곧바로 제가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더군요.

다음 날 아침, 남편에게 지난밤의 불쾌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여자 누구냐고 따졌습니다. 남편은 그냥 친구라고 하더군요. 친구라면 간밤의 무례부터 사과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쿨하게 남편 친구로 인정하겠다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

"아마 걘 기억도 못 할걸. 원래 술버릇이 그런 애야. 뭘 신경 써?"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당신이 거짓말까지 하고 몰래 만나는 여사친인데."

"내가 널 속이고 뭘 어째 보려고 거짓말한 줄 아니? 떳떳하니까 굳이 말 안 한 거야."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습니다. 떳떳하니까 거짓말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더구나 '초롬이'라는 닭살 돋는 애칭은 뭐며, 자기 네일케어 받고 온 손가락 사진 따윈 왜 보내는 거죠? 썸타는 중이 아니라면, 아무에게나 선을 넘는 무개념이 아니냐고 했더니 남편은 버럭 화를 내더군요.

"넌 앞뒤 꽉 막힌 여자가 꼭 이럴 때면 상상력이 블랙홀급이더라. 아무 사이 아니고, 그냥 생각이 자유롭게 트인 애야."

"생각이 트여서 전화 매너가 그 지경이군?"

"아, 됐어. 안 만나면 되잖아. 다시는 안 만나. 됐니?"

그 일로 우리는 며칠간 냉전을 벌였습니다. 남편의 여사친이 무조건 싫은 게 아니었습니다. 당당한 거짓말과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려는 태도가 더 화났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속으론 뜨끔했는지 일체의 개인적 접촉은 끊겠다고 약속하더군요.

솔직히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 의심하고 확인하며 사는 게 제 체질에는 영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으로 삼 년을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생전 처음 훔쳐본 남편 폰 속에, 연락처 이름만 바꾼 채로 그들은 여전히 '친구'사이네요. 일상의 사진이나 친밀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끔 어울려 술을 마시는 관계 말입니다. 더구나 단둘이도 만났던데 그나마 밤이 아닌 점심때였다는 게 이번에 남편이 내세울 알리바이일까요?

동이 터올 무렵 저는 남편을 두드려 깨웠습니다. 휴대폰을 내밀며 이게 뭐냐고. 설명해보라고 했죠. 잠이 덜 깬 남편은 잠시 멍해 있더니 곧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더군요. 그러고는 되레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 만나서 즐겼다. 하도 사는 게 지루해서, 쉬운 여자랑 술잔 기울이며 기분 좀 냈다. 사랑하는 마누라가 줄 수 있는 게 있고 밖의 쿨한 여자 친구가 줄 수 있는 게 따로 있더라. 그래서 뭐. 난 차라리 네가 밖에서 나 몰래 좀 즐겼으면 좋겠다. 정말 바람이라도 나서 나를 좀 이해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아무것도 아닌지."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십 년 결혼 생활 끝에 나는 남편이란 인간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은데, 남편은 여전히 나를 전혀 모른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나는 남편을 늘 연구하고 남편과의 관계에 고민이 많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사실 저는 남편에게 이렇게 화를 낼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저를 여자로 보지 않고 멀리했던 지난 십여 년. 저 역시 오매불망 남편의 손길만 기다리며 살지는 않았거든요. 한동안 저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았었습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생각만 해도 가슴속에 불이 켜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일 때문에 마주쳐야 하는 그 사람이 저에게는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은 그 사람을 생각하며 천천히 화장하고, 옷을 한 번 더 갈아입었었죠. 그러나 저는 맹세코 아무런 허튼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일과 무관한 대화를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제게 손을 내밀더군요. 같이 저녁 먹자고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유혹에 넘어갈지 모른다 생각했었는데, 현실의 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청을 매몰차게 거절하더군요. 아마도 무서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켜야 할 가정이 있기에 더 이상 위험한 게임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아무리 선을 그어놓는다 해도, 그런 감정의 게임을 위해 아이들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고, 남편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남사친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무어라 부를 필요도 없이 제 인생에서 힘껏 지워버렸습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 믿었기에 다시는 가까이 둘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이해할까요, 이런 감정을?

남편은 사는 게 지루했다 말합니다. 그 시간, 저는 좀 외로웠습니다. 남편에게 필요한 자극을 저는 주지 못합니다. 저에게 절실한 공감을 남편은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서로에게 정직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편의 작은 거짓말들과, 저의 큰 비밀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조선일보 B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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