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 or 품질?… 특급 호텔들이 한국 와인을 내놓기 시작했다

영동(충북)=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입력 2019.08.17 03:00 수정 2019.08.17 04:29

[아무튼, 주말- 이해림의 더 맛있는 맛] (5) 한국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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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라자 호텔 ‘르 캬바레 시떼’에서 판매하는 한국 와인 13종. ①경북 경산 비노캐슬 와이너리 ‘비노 페스티바’ 화이트와인 ②충북 영동 여포농장 ‘여포의 꿈’ 화이트와인 ③충남 예산 예산사과와인 ‘추사’ 로제와인 ④경기 화성 오노피아 ‘오놀로그’ 로제와인 ⑤경남 사천 오름주가 ‘7004S’ 키위와인 ⑥경북 영천 위 와이너리 ‘위’ 레드와인 ⑦경북 문경 제이엘크라프트 오미나라 ‘오미로제 결’ 스파클링와인 ⑧경북 영천 우아미와이너리 ‘우아미’ 레드와인 ⑨충북 영동 월류원 오드린 ‘그랑띠그르M1988’ 레드와인 ⑩강원 홍천 샤또나드리 ‘너브내 스파클링’ 화이트와인 ⑪경북 김천 수도산산머루와이너리 ‘크라테’ 세미스위트와인 ⑫경기 안산 그린영농조합 그랑꼬또 ‘청수’ 화이트와인 ⑬충북 영동 도란원 샤토미소 ‘로제’ 스위트와인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달 24일,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레스토랑 '앙스모멍'에서는 희귀한 광경의 와인 메이커스 디너가 열렸다. 디저트까지 9코스로 짜인 저녁 식사에 충북 영동 '여포와인농장'과 '도란원 샤토 미소'(이하 샤토 미소), 경북 영천 '오계리 와이너리'와 'WE(위) 와이너리', 경기도 안산 대부도 '그린영농조합 그랑꼬또', 경북 김천 '수도산 와이너리', 충남 예산 '예산사과와인'이 생산한 한국 와인 7종을 페어링해 선보였다. 와인 생산자는 당연히 방한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의 농부들. 지방 곳곳에서 상경한 7곳의 와인 생산자가 이날의 주인공인 동시에 주빈이었다.

지난 7월 초 서울시청 앞 호텔 더 플라자의 새로운 바 '르 캬바레 시떼'는 한국 와인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서울 반포의 JW메리어트호텔 서울 2층 뷔페 '플레이버즈'도 지난 5일부터 한국 와인 10종을 판매한다. 매달 말 한국 와인 생산자를 한 곳씩 선정해 시음·판매 행사도 열기로 했다.

니치 마켓 노크하는 한국 와인

한국 와인은 요즘 외식업계 최고 흥행작인 내추럴 와인의 몇 년 전 과거와 같다. 시장에서 점하는 입지가 같다. 둘 다 틈새 수요의 니치 마켓이다. 보수적인 와인업계에서 보내는 눈길도 같다. 둘 다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다. 존재 이유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 존재하고 받아칠 답도 애국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빈약한 논리밖에 없었던 때가 최근까지다.

이런 상황에서 내로라하는 특급 호텔이나 압구정 로데오 복판 레스토랑이 한국 와인을 취급하기 시작하는 것은 꽤 전격적인 일이다. 서울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에서 '오미나라'의 '오미 로제 스파클링'을 2015년부터 식전주로 사용했고, 그랜드하얏트서울의 철판구이 전문점 '테판'이 '그랑꼬또'의 '청수'를 들여놓고 있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 외 호텔이나 파인다이닝에서 한국 와인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별난 일에는 다 배후가 있는 법. 한국 와인 발전과 부흥을 꾀하는 '레지스탕스'가 활동을 시작했다. 더 플라자 르 캬바레 시떼의 최정원 소믈리에와 JW메리어트호텔 서울 플레이버즈의 정하봉 소믈리에, 앙스모멍의 노태정 소믈리에, 그리고 이들이 맏형으로 따르는 광명동굴 와인 연구소 최정욱 소장이다. 이들은 한국 와인이 지금보다도 더 열악하고 시장에서 멸시당하던 때부터 꾸준히 한국 와인을 지켜보고 채찍질하고 응원해왔다.

‘한국 와인 전도사’ 정하봉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 소믈리에, 최정원 더 플라자 르 캬바레 시떼 소믈리에, 최정욱 광명동굴와인연구소 소장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와인 부흥을 이끄는 소믈리에 레지스탕스

잠행하던 레지스탕스들이 '이제는 때가 되었다'며 일사불란하게 역할을 나눠 한국 와인 부흥에 나섰다. 르 캬바레 시떼는 잔술을 팔아 더 많은 이가 한국 와인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플레이버즈는 한국 와인 생산자들이 더 많은 소비자를 직접 만날 기회인 시음 판매 행사를 연다. 앙스모멍이 맡은 것은 한국 와인 메이커스 디너였다. 최정욱 소장은 천차만별인 한국 와인 중 맛과 품질, 생산 기술과 청결, 레이블 디자인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가장 완성도 높은 것들을 골라내고 추리는 역할을 했다. 산업 전체에 임팩트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이 레지스탕스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한국 와인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생산자들이 어느덧 성장했다. '이런 걸 와인이라고 만들었을까' 싶었던 생산자가 몇 년 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잘 만든 와인을 가져오곤 한다. 이제 질 좋은 한국 와인이 유의미한 비중을 차지한다."(최정욱)

-한국 와인 부흥을 위해 맛있는 음료를 고르고 서비스하는 소믈리에 직업 생명을 건 셈이다.

"한국 와인은 유행이 아닌, 앞으로 지속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콘텐츠가 풍부하다. 외국 와인은 생산자를 만나지 못한다. 한국 와인은 소믈리에가 생산자의 철학을 만나고, 와인이 난 밭을 둘러보고, 양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한식과 무척 잘 어울린다."(최정원)

-단맛이 과하고 장기 숙성을 거치지 않아 일반 와인 소비자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는데.

"한국 와인이 달아서 유리한 점도 있다. 식전주로 소량 마시기 적당하다. 상큼하고 달콤해 디저트와도 잘 어울린다."(노태정)

"광명동굴은 가장 많은 종류의 한국 와인을 가장 많이 판매하고 있다. 판매량 90%가 스위트 와인이다. 와인 애호가가 아닌 대중이 산다. 마시기 편하고 과실 향이 풍부한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대중 시장에서 통하는 와인을 우선 만들어 터전을 닦아 놔야 미래에 투자해 와인 애호가들도 반길 양질의 와인도 만들 수 있다."(최정욱)

"규모가 커져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후에는 가격 경쟁력도 갖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양조장마다 고급 시그니처 와인도 따로 만들 여력이 생길 것이다."(정하봉)

-한국 와인에 대한 손님 반응은.

"외국인 고객이 한국에서도 와인이 생산된다는 사실에 놀라고, 일반 와인에 없는 색다른 향을 칭찬한다."(정하봉)

"내국인 고객은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 한국 와인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우선 맛을 보여준다. 완성도 높은 한국 와인만 추렸기 때문에 편견만 벗어나면 좋은 평가가 나온다. 익히 아는 과일의 맛과 향이 와인으로 변신했다는 데에 놀란다."(최정원)

-아무튼 음식과 잘 어울리는지가 관건이다.

"한국 와인이 가진 달콤함이 현재 한식 맛과 잘 어울린다. 맵고 달고 짠 음식에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무겁지 않아 식사에 곁들이기 좋다. 일례로 여포와인농장 여포의 꿈은 아카시아꽃 향이 나고 보디감은 가벼워서 코다리찜과 잘 어울린다."(최정욱)

"차례 음식과도 매우 잘 어울려서 명절 때 마시기도 좋다. 제주도 토속 음식과도 잘 어울렸다."(최정원)

-한국 와인의 존재 의의는.

"수입 와인 시장은 70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양적 성장은 멈춘 상태다. 7000억원 안에서의 다양성을 동력으로 돌아가는 산업이다. 그리스 와인, 독일 와인, 조지아 와인 등 와인 시장에도 유행이 있고 내추럴 와인이 새로운 유행이 되며 일정한 영역을 가져갔다. 한국 와인은 새로운 다양성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정하봉)

레지스탕스가 주사위를 던졌다. 한국 와인 부흥을 꿈꾸는 이들은 훗날 한때의 키치로 기억될까, 니치 마켓의 르네상스맨으로 기억될까.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들의 활동이 업계를 자극하고 소비자의 호기심을 노크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도 수확기를 앞두고 이달 말부터는 영동과 대부도, 광명동굴 등지에서 한국 와인 축제가 연이어 열린다. 소믈리에들이 대거 집결하는 대전국제와인페스티벌도 23일부터다. 훗날 한국 와인사에는 이들의 레지스탕스 작전이 의미심장한 마중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노태정·정하봉·최정욱·최정원
소믈리에 추천 한국 토종 와인 베스트 8


①특징 ②지역 ③생산자 ④잘 맞는 음식

그랑꼬또 캠벨 얼리 로제  ①가장 한국적인 포도인 캠벨 얼리의 익숙한 맛과 향으로 만든 한국 와인. 기본기가 충실하고 밸런스가 좋다.  ②경기 안산 ③그린영농조합 ④갑각류

샤토미소 로제 ①같은 캠벨 얼리 포도를 사용하지만 테루아에 따라 와인도 다르다. 과실즙 같은 화사한 상큼함이 더욱 부각되어 시원하게 마시기 좋다. ②충북 영동 ③도란원 ④샐러드

오놀로그 로제  ①맑은 핑크빛이 좋다. 한식과 주거니 받거니 뛰어난 궁합을 보여준다. ②경기 화성 ③오노피아 ④닭볶음탕

추사 로제 ①속까지 빨간 레드 러브 품종의 사과로 만든 사과 와인. 사과를 그대로 먹는 듯한 싱그러움이 느껴지며 목 넘김도 부드럽다. ②충남 예산 ③예산사과와인 ④사과가 들어간 샐러드

비노 페스티바 화이트 와인 ①경북 경산의 청수 품종으로 만든 와인으로 생산량은 적지만 최고 품질의 와인으로 꼽힐 만하다. ②경북 경산 ③비노캐슬 와이너리 ④월남쌈

크라테 레드 세미 스위트 ①보디감이 뛰어나고 레드 와인의 묵직함을 잘 살렸다. 포도가 아닌 머루로 만드는데 가르나차나 그르나슈 포도로 만든 와인을 연상시키는 맛이다. ②경북 김천 ③수도산 산머루 와이너리 ④햄버거

7004S ①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닌 키위 와인. 풍만한 질감을 갖고 있으며 부드러운 산미가 느끼함을 잘 잡아주어 추석 명절 음식과도 잘 맞는다. ②경남 사천 ③오름주가 ④해물파전

너브내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 ①강원농업기술원이 육종한 청향 포도로 만든 한국의 모스카토 다스티 와인. 열대 과일 같은 매력적인 향이 일품이다. ②강원 홍천 ③샤또나드리 ④그린 샐러드

‘찾아가는 양조장’에 올해 선정된 ‘샤토 미소’ 안남락 대표. /대동여주도
한국 와이너리 방문 프로그램도… 포도 재배·양조 다양한 실험 중

38곳 관광자원으로 육성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는 ‘찾아가는 양조장’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실력 있는 양조장을 지역 관광 자원으로 육성하는 두 마리 토끼 전략이다. 현재 총 38곳의 한국술 양조장이 선정되어 2년간 지원을 받는다. 지난달 25일, 올해 새롭게 선정된 충북 영동의 두 곳 한국 와인 생산자를 방문해 한국 와인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볼 기회가 있었다. 샤토 미소와 여포와인농장은 위 소믈리에들이 선택한 바대로 한국 와인 중 톱 레벨로 꼽히는 생산자다.

포도 재배와 양조. 한국 와인도 구대륙과 신대륙의 그 모든 와이너리와 다름없는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한국에서 와인을 만들 때 가장 큰 장해는 구대륙과 신대륙에서는 적응을 마친 와인 양조용 포도 품종들이 한국 기후에 맞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양조 기술이나 설비, 지식과 경험이 이미 최소 100년 이상 와인을 만들던 그들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 와인 생산 현장을 해외와 비교하자면 아직은 빗살무늬토기에 과실주 발효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 주목할 점은 이 생산자들이 무척 빠르고 열성적으로 수준을 발전시켰고 그 발전 에너지가 방전되지 않은 채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샤토 미소는 양조를 파고들고 있다.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다양한 와인을 하나하나 도전하는 자세로 만들어 보고 있다. 잔당이 완전히 소비된 드라이한 와인, 높은 기압의 기포가 꽉 채워진 스파클링 와인 등 샤토 미소의 양조 도전은 경험치로 축적되고 있었다. 여포와인농장은 포도 재배에 골몰한다. 다양한 품종을 재배해 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양조에 적합한 소출이 나도록 연구 중이다. 포도밭 줄마다 심겨진 포도나무의 품종이 다른 밭이 있고, 어느 밭은 잡초를 무성하게 두거나 어느 밭은 물을 극한으로 제한해 기르는 여러 실험을 해가며 최적의 한국 와인용 포도를 발견해 가는 중이다.

조선일보 B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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