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사노맹

이명진 논설위원
입력 2019.08.14 03:16

1989년 겨울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서울대에 유인물이 뿌려졌다.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고자 전 자본가 계급을 향해 정면으로 계급 전쟁의 시작을 선포한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출범 선언문이었다. 드러내놓고 계급혁명을 표방해 충격을 줬다. 1989년이면 6·29 선언으로 헌법이 바뀌고 대통령 직선이 이뤄지는 등 민주화가 사실상 이뤄진 때였다. 하지만 운동권은 이미 '민주화'가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운동권 주류는 NL 주체사상파였다. 그 반대편에 PD 민중민주 계열이 있었다. 사노맹은 NL과 PD에서 한 글자씩 따서 ND라고 칭하면서 '제3의 길'을 추구했다. 사노맹 수사를 했던 검사는 "북을 비난하면서 남한 자체 사회주의 지도부를 표방하던 독특한 반국가 단체"라고 했다. 반국가 단체는 북 정권이 대표적이다. 국내 반국가 단체는 대부분 북과 연계된 조직·집단이었다. 사노맹은 북과 상관없이 반국가 단체 판결을 받은 드문 경우다.

▶왜 그런지는 수사와 재판에서 드러났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사노맹 투쟁 슬로건엔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분배' '민중위원회 설치'가 들어 있고, 목표는 '특공대가 총파업을 유도한 뒤 결정적 시기에 봉기, 사회주의 혁명 달성'이라고 했다. 레닌의 당조직 원리를 따랐는데 중앙위 아래 연락국은 폭발물 개발, 무기 탈취, 독극물 개발 임무를 맡는다고 돼 있다. 조직원 검거에 대비해 가스총, 염산을 비치해두고 자살용 독약 캡슐도 개발 중이었다고 한다. 법원은 "무장봉기를 통한 (남한) 체제 전복을 추구해 온 점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90년대 초반 주동자였던 시인 박노해(중앙위원)씨와 서울대 학도호국단장 출신 백태웅(중앙위원장)씨 등이 검거되면서 사노맹은 와해됐다. '남로당 이후 최대 자생적 좌익 지하조직'이라고 했다. 박씨와 백씨는 김대중 정권 때 준법서약서를 쓰고 풀려나 사면을 받았다. 로스쿨 교수가 된 백씨는 "미숙한 점이 많았다"고 했고, 박씨는 "급진적 사회주의에 치우친 점 반성한다"고 했다.

▶그 사노맹이 요즘 다시 화제다. 사노맹 산하 조직인 남한사회주의과학원 활동으로 국보법 위반 유죄를 받은 조국 전 민정수석이 다른 자리도 아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법치를 수호해야 할 법무장관 지명을 받으면서다. 야당은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이게 말이 되느냐"고 하고 여당은 "색깔론"이라고 엄호한다. 조 지명자는 "(사노맹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다는데 청문회에서 어떤 해명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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