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달달하게 책 읽기] 국적 불명 안주들이 한정식으로 둔갑

우석훈 경제학자
입력 2019.08.10 03:00

한식을 위한 변명

우석훈 경제학자

집권당 대표가 사케를 마셨느니, 일식집 '도쿠리'에는 국산 청주가 들어간다느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청주의 기원과 변천 같은 얘기로도 책 한 권이 될 법한데, 이런 책은 돈이 되지 않으니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음식 평론가 황광해의 '한식을 위한 변명'을 읽고 나서 내 20대, 음대 대학원을 준비할지 고민하던 시절이 잠시 생각났다. 이왕직 아악부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었다. 망한 나라 황제를 이왕으로 낮추어 불렀지만, 어쨌든 궁중 아악대는 공식 조직으로 남아 일제강점기에 국악이 그 나름대로 보존은 되었다. 그렇다면 음식은? 왕실 요리사인 대령숙수와 궁중 나인에 의해서 가까스로 보존됐다는 것이 우리 상식이다. 황광해는 이게 아니라는 거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짜 뉴스'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거다. 하긴, 국악이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서 겨우겨우 보존된 것과 비교해보면 궁중의 실상이 보존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책은 진짜 재밌다. 태국 음식 '톰양쿵'에 쓰던 그릇이 조선에서는 차나 술을 덥히는 값싼 요리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게 신선로라는 희한한 음식으로 둔갑했다는 얘기도 처음 봤다. 조선이 망한 뒤에야 한국에 들어온 당면으로 만든 궁중 잡채는 기가 막힐 뿐이다. 게다가 술 마시는 안주 위주의 국적 불명 요리들이 요정을 거쳐 한정식으로 둔갑하는 과정은,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궁중 음식에 대해서만 분석을 들이댄 것은 아니다. 전통과 상관없는 보양식은 물론이고, 사찰 음식에 대해서도 쓴소리가 쏟아진다. "그날 유명 사찰 음식 전문점에서 받아 든 사찰 음식은 화려하고 천박한 채식 밥상이었다." 이 구절에서 너무 통쾌해 손뼉을 치고 말았다.

몇 년 전부터 호텔에서 한식 식당이 점점 철수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부에서 '한식 세계화'를 외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국민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꼴이다. 수십 년간 일본식 음식 산업에 길들여진 달고 근본 없는 한식이 더는 길을 못 찾는 것 같다. 이제라도 한식, 아니 '한식의 정신'이 복원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 아니라, 한식을 한식으로 만든 바로 그 정신에 주목한 황광해, 그가 하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조선일보 A16면
공시지가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