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하지만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한 끼… 한여름 박고지 씹는 듯 질박한 순대

정동현
입력 2019.08.10 03:00 수정 2019.08.13 13:27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순대집편
서울 중림동 '황성집'

퇴근길, 집으로 가는 언덕은 유혹의 전시장이었다. 낮고 긴 의자를 덧댄 포장마차가 길목마다 서 있었다. 포장마차 앞에서 여러 번 망설였다. 빨간 국물에 몸을 섞은 떡볶이, 뽀얀 국물에 잠긴 어묵, 황금빛을 띤 튀김이 노란 불빛 아래 놓여 있었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두꺼운 비닐을 덮어 놓은 순대였다. 순대를 밥 대신 먹어도 좋았다. 영양학적으로 봐도 완전한 한 끼였다. 당면은 탄수화물, 간을 비롯한 내장은 단백질과 무기질, 미네랄이 충분했다.

장정 서넛이 먹어도 넉넉한 황성집 모둠순대.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의자에 주저앉는 대신 여러 번 순대를 포장해갔다. 집에는 나이 든 고양이가 있었다. 순대를 뜯지 않고 조금 더 기다리면 예순 넘어서도 출퇴근을 멈출 수 없던 어머니가 집 문을 열었다.

"순대가 먹고 싶었니?" 어머니가 말을 걸면 나는 "그냥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이다를 유리잔에 따르고 쌈장과 꽃소금을 작은 그릇에 담았다. 봉지를 뜯고 어머니와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순대를 나눠 먹었다. 고양이에게는 간을 조금 잘라 던져줬다. 순대 한 봉지로도 충분한 저녁이었다.

순대는 본래 가난함과 절박함의 산물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 동물의 내장에 속을 채워 넣은 음식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전 인류가 배고픔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방증이다. 아직도 순대는 배고픔을 값싸게 해결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광화문 사거리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자리한 '화목순대국'은 싸고 든든한 한 끼를 원하는 직장인들로 매일 붐빈다. 저녁이 되면 머리고기와 순대가 한 접시 가득 나오는 '모듬'을 시켜놓은 테이블이 절반 이상이다. 손님의 90%가 남성인데 주말이면 근처에서 당직을 서는 신문사 기자들이 또 90%를 차지한다. 말린 당근과 파 같은 채소, 당면을 써서 무겁지 않은 달콤한 감칠맛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새콤한 깍두기를 곁들이고 얼큰한 국물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낭만 없는 직장인의 하루도 이만하면 꽤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면순대가 아닌 피순대 계열을 찾는다면 전북 전주의 '조점례남문피순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늦은 밤, 불이 꺼져 싸늘한 느낌마저 드는 전주 남부시장에서 홀로 환히 불을 켜놓고 영업하는 이 집은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엉켜 배를 채우고 작은 잔을 비운다. 방송에도 나온지라 젊은 객들도 꽤 보인다. 나오는 음식은 시류에 영합하는 모양새가 아니다. 영국의 블러드소시지(blood sausage)를 연상시키는 뻑뻑한 순대의 밀도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입에 넣으면 운동장을 한 바퀴 뛰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 날, 몸이 끌리는 곳은 서울 충정로 '황성집'이다. 닭꼬치로 유명한 '호수집'을 지나 약현성당 정문 옆 좁은 골목을 거슬러 올라가면 간단히 '순대국'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황성집이다.

파마머리 주인장 홀로 지키는 이곳의 메뉴는 순댓국집답게 단출하다. 머리고기와 대창순대가 함께 나오는 모둠, 순대만 한 접시 나오는 왕순대 같은 것을 시키면 장정 몇이 와도 모자람이 없다. 곡류와 채소 등을 선지와 함께 욱여넣은 순대는 한여름 박고지를 씹는 것처럼 질박한 맛이 난다. 잘 삶은 돼지 간은 퍽퍽하지 않고 매끈하며 섬세하다. 순댓국은 된장을 풀어 넣어 성난 아린 맛이 아닌 속 깊은 울림을 준다. 빗소리를 들으며 깍두기와 김치를 곁들인다.

주인장은 작은 주방에서 그만큼 작은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톡톡, 보글보글, 또르르, 살가운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여름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선일보 B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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