癌으로 머리 민 아내… 내눈엔 그저 부처 같소

정상혁 기자
입력 2019.08.08 03:00

한용진·문미애 '직관과 교감'展

"나의 부인, 40년을 같이 흘러온 그대요. 영원히 영원히 너의 곁에 있으리. 연애까지 넣으면 50년이지." 2003년 12월 27일, 남편은 병상에 누운 아내를 작은 메모지에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사진〉 아내의 얼굴은 무심해 보인다.

나흘 뒤 남편은 다시 노트에 썼다. "오늘도 잘자 미애야. 내일이면 새해. 새해는 건강해서 같이 또 일하자. 응!" 연필로 대강 그린 아내는 뇌암과 척추암을 앓으며 조용히 눈감고 있다. 그림 속 베개맡에 별 몇 개를 그려넣었다. 아내는 두 달 뒤 지상을 떠났다.

/정상혁 기자
조각가 한용진(85)과 화가 문미애(1937~2004) 부부의 예술 세계를 진열한 전시 '직관과 교감'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10월 13일까지 열린다.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하며 명성을 떨친 한용진의 조각·수채화·드로잉 등 200여점, 고교 2학년 때 국전(國展)에 입선하며 '천재 소녀'라는 별칭을 얻은 문미애의 유화·회화조각설치 등 60여점이 공개된다.

이 중에서도 관람객의 마음이 오래 머무는 곳은 1년간 아픈 아내를 간호하며 독백하듯 그려낸 '미애 얼굴' 드로잉 연작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 미대 커플이었고, 1962년 결혼해 5년 뒤 미국 뉴욕에 정착해 활동했다.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일련의 드로잉은 가족이자 분신이었고 때로 격렬히 다툰 예술적 동지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 인위적인 미감을 배제하고 종이 조각이나 티슈 등 아주 사소한 공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암 치료 탓에 몸은 붓고, 머리는 전부 민 아내는 후덕한 부처처럼 그려졌다. 단순히 분위기로서가 아니라 실제 불상(佛像)처럼 그린 것도 있다. 백승이 학예사는 "평소 동양철학에 관심 깊던 한용진이 이 같은 도상을 통해 어떤 소망이나 기원을 담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1층 전시장 벽면에 '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이라 한용진이 적은 공책 낱장이 걸려 있다. 대종교 경전 '천부경'의 한 구절로, 우주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는 의미다. 훗날 한용진은 "미애가 없어진 건 아니다. 오그라들어 콩처럼 씨앗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A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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