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골 먹고 첫골… 눈물 펑펑 흘린 女수구 선수들

광주=주형식 기자
입력 2019.07.17 03:00

세계수영선수권 러시아에 1:30패
종료 4분 전 경다슬이 득점에 성공… 관중 1300명도 '대~한민국' 함성

한국 여자 수구 국가대표 김예진(18·창덕여고)은 16일 러시아와 벌인 세계수영선수권 조별리그 2차전 중 벤치석에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우리 애들 정말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제발 한 골만요, 제발."

물을 만진 손에서 땀이 날 정도로 간절한 바람이었다. 한국이 러시아에 0-24로 뒤지고 있던 종료 막판까지도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종료 3분44초 전 경다슬(18·강원체고)이 러시아 골문 오른쪽 측면에서 강력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한국 여자 수구가 광주세계수영선수권 두 번째 경기에서 마침내 첫 골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한 여자 수구 대표팀 선수들이 16일 광주 남부대학교 수구경기장에서 러시아와 벌인 조별리그 B조 2차전에서 경다슬의 역사적인 첫 골이 터지자 벤치에서 일어나 환호하고 있다.이미지 크게보기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한 여자 수구 대표팀 선수들이 16일 광주 남부대학교 수구경기장에서 러시아와 벌인 조별리그 B조 2차전에서 경다슬의 역사적인 첫 골이 터지자 벤치에서 일어나 환호하고 있다. 김예진(왼쪽 뒷줄 둘째)은 울음을 터뜨렸고 동료 선수들도 박수를 치며 첫 골의 기쁨을 만끽했다. /연합뉴스
결성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한국 여자 수구의 첫 번째 득점이었다. 상대는 역대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다섯 차례 차지한 강팀 러시아였다. 김예진은 동료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이윽고 관중 1300여명이 외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함성에 물속에 있던 선수들까지 순간 울보가 됐다.

대표팀은 이날 러시아에 1대30(0-7 0-9 0-8 1-6)으로 완패했다. 앞선 헝가리와 벌인 1차전에서 0대64에 이어 또다시 큰 점수 차로 패했다. 2연속 패배에 94실점 1득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다. 선수들은 1차전 대패 이후 인터넷 기사에 달린 수많은 악플을 보며 밤잠을 설쳤다.

경다슬
'우리나라 망신이다. 선수들 상대로 소송 걸어야 된다' '손에 참기름 발랐냐' 등 쓴소리와 비아냥이 이어졌다. 송예서(18·서울체육고)는 "우리는 죽을 힘을 다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결과만 갖고 평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너무 슬펐다"고 했다. 대표팀 총 13명엔 여고생이 9명이나 있다. 이 중 수능을 앞둔 고 3만 6명이다.

하지만 선수들은 뒤로 숨지 않았다. 주장이자 맏언니인 골키퍼 오희지(23·전남수영연맹)는 "헝가리전에서 64골 먹은 다음에 더 오기가 생겼다. 모든 선수가 경기 전 '이길 가능성이 1%가 안 돼도 우리 스스로 경기를 포기하는 초라한 팀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대표팀에서 수구를 전문적으로 배운 선수는 한 명도 없다. 대회를 얼마 앞두고 처음 수구를 처음 접한 경영 선수 출신이 대부분이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 표정에선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대표팀은 지난 한 달 여 동안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조직위원회와 대한수영연맹은 남북 단일팀으로 여자 수구 자동 출전권을 활용하기로 했지만, 아무런 의사도 밝히지 않은 북한만 바라보다가 시간이 마냥 흘렀다. 결국 지난달 2일 팀을 결성했지만 대한체육회의 재정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반쪽짜리' 국가대표로 전락했다. 대한체육회가 요구하는 대표팀 요건(국제대회 성적 등)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하루에 훈련수당 명목으로 2만원을 받는데, 이는 국가대표 수당의 3분의 1 수준이다. 진만근 대표팀 코치는 "시한부 국가대표다. 어린 선수들에게 내년을 약속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여자 수구에 허락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18일 캐나다와 예선 3차전을 치른다. 대회가 끝나면 여자 수구 대표팀은 각자 길로 흩어진다.


조선일보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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